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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절친 "병갑씨"를 소개합니다.
- 작성일
- 2014-04-11 09:01:02
- 작성자
- 서필상
- 조회수 :
- 142
(사진은 조병갑 선정비 철거를 위한 공대위 서명운동장면입니다.)
오리 절친 " 셀프 선정비를 세운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 그는 누구인가? "
2014년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12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역사적으로 동학농민 혁명은 종교차원을 넘어 당시 농민과 민중의 생존권이 걸린 반제 반봉건운동이고, 사회개혁을 위한 민중운동이었습니다.
와 에 의하면 1886고종23년 7월 조병갑이 함양에 부임하였으며, 1887년 8월6일 당시 43세에 金海 부사로 부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887년7월에 건립된 탐관오리 조병갑의 인생과 “선정비”를 보자면 감옥에 서있어도 모자랄 판에 지금 서있는 위치는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습니다.조병갑이 함양과 김해의 부임시기를 보면 함양의 선정비는 조병갑이 직접세운 셀프 선정비로 봐도 손색이 없습니다.
조병갑이 함양에 부임한 10월에 부친 조규순 영세불망비 비각을 세워 이건 하였고,
현재 조병갑의 부친인 조규순의 영세불망비도 상림 역사공원에 세워져 있습니다.
130여년전 함양군수를(1886.8~1887.7) 지낸 선정비의 주인공 탐관오리 조병갑 그는 누구인가? 조선왕조실록보다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는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893년 탐관오리 조병갑은 고부 군수로 부임하여 악행, 악정으로 굶주린 주민들을 쥐어짰고 이는 곧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후 의금부에 수갑과 칼을 쓰고 구속되었고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전라도 고금도로 귀양살이를 하던 중,1895년 3월 “조병갑이 지은 죄에 비해 처벌이 가벼워 국법을 올바르게 적용하지 못했다.”하여 또 다시 유배지에서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으나,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으로 시대상황이 어지럽고 조정에 변란이 일어나 녹두장군 전봉준이 사형되던 해 매국노 이완용을 필두로 한 친일파의 사면을 받았습니다.
조병갑의 행적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제공자인 탐관오리 조병갑은 사면된 후 판사로 임용되어 동학교주 제2대 교주인 최시형에 대한 사형을 선고하는 불운의 역사를 만드는 주인공이 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실을 기억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으면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탐관오리 조병갑의 개인사를 세밀히 추적하다 보면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리 절친 " 셀프 선정비를 세운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 그는 누구인가? "
2014년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12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역사적으로 동학농민 혁명은 종교차원을 넘어 당시 농민과 민중의 생존권이 걸린 반제 반봉건운동이고, 사회개혁을 위한 민중운동이었습니다.
와 에 의하면 1886고종23년 7월 조병갑이 함양에 부임하였으며, 1887년 8월6일 당시 43세에 金海 부사로 부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887년7월에 건립된 탐관오리 조병갑의 인생과 “선정비”를 보자면 감옥에 서있어도 모자랄 판에 지금 서있는 위치는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습니다.조병갑이 함양과 김해의 부임시기를 보면 함양의 선정비는 조병갑이 직접세운 셀프 선정비로 봐도 손색이 없습니다.
조병갑이 함양에 부임한 10월에 부친 조규순 영세불망비 비각을 세워 이건 하였고,
현재 조병갑의 부친인 조규순의 영세불망비도 상림 역사공원에 세워져 있습니다.
130여년전 함양군수를(1886.8~1887.7) 지낸 선정비의 주인공 탐관오리 조병갑 그는 누구인가? 조선왕조실록보다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는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893년 탐관오리 조병갑은 고부 군수로 부임하여 악행, 악정으로 굶주린 주민들을 쥐어짰고 이는 곧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후 의금부에 수갑과 칼을 쓰고 구속되었고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전라도 고금도로 귀양살이를 하던 중,1895년 3월 “조병갑이 지은 죄에 비해 처벌이 가벼워 국법을 올바르게 적용하지 못했다.”하여 또 다시 유배지에서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으나,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으로 시대상황이 어지럽고 조정에 변란이 일어나 녹두장군 전봉준이 사형되던 해 매국노 이완용을 필두로 한 친일파의 사면을 받았습니다.
조병갑의 행적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제공자인 탐관오리 조병갑은 사면된 후 판사로 임용되어 동학교주 제2대 교주인 최시형에 대한 사형을 선고하는 불운의 역사를 만드는 주인공이 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실을 기억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으면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탐관오리 조병갑의 개인사를 세밀히 추적하다 보면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 담당
- 행정과 정보전산담당 (☎ 055-960-4240)
- 최종수정일
- 2024.07.23 20:5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