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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실상사 여름정기 템플스테이 신청 접수
- 작성일
- 2015-06-26 17:19:31
- 작성자
- 정혜지
- 조회수 :
- 95
[알림] 2015 재가불자 여름학림 (윤회론을 공부해요)
글쓴이 : 실상사
자세한 내용과 신청을 위해서 실상사 홈페이지를 방문하시거나
첨부파일의 하이퍼링크를 클릭해주세요.
http://www.silsangsa.or.kr/bbs/board.php?bo_table=templestay&wr_id=2730
(1) 주 제: 윤회설(輪廻說)
(2) 강 사: 해강스님(실상사 재가학림 학장)
(3) 일 시: 1차 7월 29일(수)~ 8월 2일(일) 4박 5일, 2차 8월 5일(수)~ 8월 9일(일) 4박 5일
(4) 장 소: 실상사 재가학림 강당
(5) 참가비: 25만원
(6) 문 의: 063-636-3191, 템플스테이 실무자
나는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 죽어 다음 생에는 무엇이 될까 ?
과연 이생에서 저 생으로 돌고 도는 윤회는 있는 것일까?
부처님은 모든 존재의 무아(無我)를 말씀하셨는데 윤회(輪廻) 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다음 생에 내가 원하는 대로 좋은 곳, 좋은 몸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윤회설은 불교의 주요 사상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작 윤회에 대해서 어느 경론이나 어느 누구도
모두가 공감하는 명쾌한 정의를 내려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교 사상사에서 이 주제만큼 어설픈 논란이 난무한 것도 없습니다.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도 궁금합니다. ‘윤회(輪廻)’ 그것이 무엇인가 ?
그래서 우리도 올 여름 실상사 강당에 모여
그 어설픈 논란에 한 자리 끼어듦으로써 조금이나마 궁금증을 풀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역시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십중팔구는 그럴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더운 여름날 산사에서
좋은 도반들과 함께 앉아 내 삶의 과거와 미래를 넘겨다보며
법담을 나누는 것만큼 상쾌한 피서가 또 어디 있으랴 !
불교의 ‘윤회’ 그 불순한 형이상학의 교설에 대하여
한줌의 재로 변한 아버지를 바람에 날리고 산을 내려오는 길에 흰 나비 한 마리 어머니 머리위에 날아와 앉았다. 참으로 극적인 우연의 만남이다. 아니다, 운명적인 필연이었다.
“아! 아버지가 나비가 되셨나보다, 아버지 혼령이다. 우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오셨나보다. 나비는 극락으로 날아간다 하던데 아버지 극락 가시나보다 ”
가족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외쳤다. 그렇게 가족들의 마음에 아버지는 하얀 나비로 환생하셨다.
오랜 병고에 시달리던 한 신도가 진지하게 물었다.
“내 병이 전생에 지은 업보라는데, 내가 전생에 무엇이었으며, 어떤 업을 지었기에 이런 과보를 받는 것입니까, 이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최초 발언자는 모르겠으나 불가에서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전생의 내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면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라, 또 다음 생의 내가 무엇이 될지 궁금하면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라”
풀어 말하자면 지금 내 삶의 모습은 다 전생에 내가 지은 업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듯 다음 생에 내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아갈는지는 지금 내가 살면서 짓는 업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불교의 인과응보에 따른 업설이요, 업설에 따른 윤회설이란다. 과연 그럴까?
참으로 앞의 신도가 앓고 있는 병고가 다 그가 전생에 지은 죄 값일까? 그러니 죄업이 무서운 줄 알아 금생에 착한 업을 많이 지어 다음 생에는 건강하게 복 받으며 살라는 것이 불교의 주요 교설이라는 윤회설(인과 = 업 = 윤회)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비록 이 생에 내 의지로 새로운 업을 짓는다는 주체적인 길을 열어두고는 있으나 숙명론에 가깝지 않은가?
지금 아프리카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저 아이들은 전생에 무슨 죄업이 그리도 많아서일까. 그것이 오롯이 그 아이들의 전생업보라면 그들의 배고픔은 금생에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겠다. 인과는 엄연하니까. ‘두렵구나, 불교는 …’
이 겁나는 윤회설은 부처님께서 질타하셨던 불교 이전․후 힌두교의 윤회설과 어떻게 다른가?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업(윤회)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만을 가르친다”
[Mahavastu - ('무아 윤회문제의 연구’ 윤진호, 민족사)- 재인용]
불교 이전부터 있어온 인도의 전통 윤회설은 윤회의 주체로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영혼’ 같은 실체를 전제한다. 그러한 실체적 자아가 없으면 인과윤회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 불교는 윤회설을 주요 교리로 취급해왔다.
기존의 인도 사상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불교 궁극의 목적도 곧 모든 고통, 나아가 근원적인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해탈이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이것을 위해 설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는 길에서 부처님이 가장 중요하게 말씀하신 것은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 자아가 참으로 있다는 생각에서부터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아설 無我說 은 불교의 핵심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불친절한 설명 때문일까? 후학들은 의심한다.
‘자아가 없는데 누가 과보를 받으며, 무엇이 윤회하는가?’
윤회의 주체문제에 있어 무아와 윤회는 양립할 수 있는가, 아니면 결코 양립할 수 없는가? 둘 다 불교의 주요 사상이라면 어떻게 융통시킬 것인가?
누구는 절대 양립불가를 외치며 윤회설은 불교가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양립가능을 말하며 그 길을 ‘아뢰야식, 연기’ 등의 이론을 들어 제시한다.
어떤 이는 윤회설을 윤리적 방편설로 취급하기도 한다.
이렇게 무아와 윤회의 끊임없는 논란이 2천여 년 불교 사상사의 큰 줄기를 차지한다. 그러나 아직도 누구나 공감하는 이론이 없다. 모두 제각각 법에 맞는 합리적 이론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와 윤회설’의 실상임에도 현재 한국불교 안에서는 흔히 숙명적인 윤회설을 마치 진정한 부처님의 교설인 것처럼 가르치고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공부는 특정 교재를 가지고 깊이 있게 접근하기보다는 윤회설의 대략적인 개념 이해를 토대로 스스로 생각하고 정리하여 대중과 함께 나누는 공부를 하려 한다.
윤회설에 대한 자기정리를 원하는 분들이 많이 참여하신다면 더욱 진지한 자리가 될 것이다. 이 공부에 동참하려는 분은 틈나는 대로 윤회에 관한 자료를 미리 찾아보고 정리해 온다면 더욱 내실 있는 공부를 만들 수 있겠다.
불교의 윤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아와 무아, 업과 인과, 아뢰야식, 연기’ 등의 교리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준비할 여유가 없으면 그냥 함께해도 좋다. 그리 어려운 공부는 아닐 것이다.
이번 여름 실상사 재가학림에서 4박 5일의 공부로 혼란한 윤회설을 일도양단하거나 명쾌하게 정답을 내 놓자는 것은 아니다. 이러니저러니 하는 그 장황한 이론들을 다 살펴볼 수도 없다.
윤회설이 부처님의 중요한 가르침이라면, (불교의 핵심사상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미뤄두고) 그 가르침을 폭력적이며 반인륜의 사상으로 몰아가는 숙명론적인 윤회설을 덜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럴 수 있다면 말이다.
삶은 그리울 때 아름답고, 꿈 꿀 때 행복하다.
그리고 거기서 멈춘다면 괴롭지 않으리라.
과거를 아름답게 그리워하고 미래를 행복하게 꿈꾸면 현재가 평화롭다.
그러기 위해 나의 현재 삶에 과거 업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미래에 족쇄를 채우는 종교의 공갈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 지금 내 삶에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는 부처의 눈이 필요하다.
“관세음보살이 매우 열심히 지혜의 길을 수행할 때에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본래 텅 비어 실체가 없음을 알고 난 뒤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버렸다. 수행자여! 세상존재를 이루는 모든 것이 그 모습 그대로 텅 비었음의 모습이요, 텅 비어 실체가 따로 없기에 세상 모든 존재를 이루느니라. 그렇듯이 우리의 정신활동도 그러하니라. 수행자여! 세상 모든 존재의 텅 비어있는 참모습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거나 줄지도 않느니라…” [반야심경]
글쓴이 : 실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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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 제: 윤회설(輪廻說)
(2) 강 사: 해강스님(실상사 재가학림 학장)
(3) 일 시: 1차 7월 29일(수)~ 8월 2일(일) 4박 5일, 2차 8월 5일(수)~ 8월 9일(일) 4박 5일
(4) 장 소: 실상사 재가학림 강당
(5) 참가비: 25만원
(6) 문 의: 063-636-3191, 템플스테이 실무자
나는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 죽어 다음 생에는 무엇이 될까 ?
과연 이생에서 저 생으로 돌고 도는 윤회는 있는 것일까?
부처님은 모든 존재의 무아(無我)를 말씀하셨는데 윤회(輪廻) 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다음 생에 내가 원하는 대로 좋은 곳, 좋은 몸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윤회설은 불교의 주요 사상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작 윤회에 대해서 어느 경론이나 어느 누구도
모두가 공감하는 명쾌한 정의를 내려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교 사상사에서 이 주제만큼 어설픈 논란이 난무한 것도 없습니다.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도 궁금합니다. ‘윤회(輪廻)’ 그것이 무엇인가 ?
그래서 우리도 올 여름 실상사 강당에 모여
그 어설픈 논란에 한 자리 끼어듦으로써 조금이나마 궁금증을 풀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역시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십중팔구는 그럴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더운 여름날 산사에서
좋은 도반들과 함께 앉아 내 삶의 과거와 미래를 넘겨다보며
법담을 나누는 것만큼 상쾌한 피서가 또 어디 있으랴 !
불교의 ‘윤회’ 그 불순한 형이상학의 교설에 대하여
한줌의 재로 변한 아버지를 바람에 날리고 산을 내려오는 길에 흰 나비 한 마리 어머니 머리위에 날아와 앉았다. 참으로 극적인 우연의 만남이다. 아니다, 운명적인 필연이었다.
“아! 아버지가 나비가 되셨나보다, 아버지 혼령이다. 우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오셨나보다. 나비는 극락으로 날아간다 하던데 아버지 극락 가시나보다 ”
가족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외쳤다. 그렇게 가족들의 마음에 아버지는 하얀 나비로 환생하셨다.
오랜 병고에 시달리던 한 신도가 진지하게 물었다.
“내 병이 전생에 지은 업보라는데, 내가 전생에 무엇이었으며, 어떤 업을 지었기에 이런 과보를 받는 것입니까, 이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최초 발언자는 모르겠으나 불가에서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전생의 내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면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라, 또 다음 생의 내가 무엇이 될지 궁금하면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라”
풀어 말하자면 지금 내 삶의 모습은 다 전생에 내가 지은 업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듯 다음 생에 내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아갈는지는 지금 내가 살면서 짓는 업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불교의 인과응보에 따른 업설이요, 업설에 따른 윤회설이란다. 과연 그럴까?
참으로 앞의 신도가 앓고 있는 병고가 다 그가 전생에 지은 죄 값일까? 그러니 죄업이 무서운 줄 알아 금생에 착한 업을 많이 지어 다음 생에는 건강하게 복 받으며 살라는 것이 불교의 주요 교설이라는 윤회설(인과 = 업 = 윤회)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비록 이 생에 내 의지로 새로운 업을 짓는다는 주체적인 길을 열어두고는 있으나 숙명론에 가깝지 않은가?
지금 아프리카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저 아이들은 전생에 무슨 죄업이 그리도 많아서일까. 그것이 오롯이 그 아이들의 전생업보라면 그들의 배고픔은 금생에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겠다. 인과는 엄연하니까. ‘두렵구나, 불교는 …’
이 겁나는 윤회설은 부처님께서 질타하셨던 불교 이전․후 힌두교의 윤회설과 어떻게 다른가?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업(윤회)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만을 가르친다”
[Mahavastu - ('무아 윤회문제의 연구’ 윤진호, 민족사)- 재인용]
불교 이전부터 있어온 인도의 전통 윤회설은 윤회의 주체로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영혼’ 같은 실체를 전제한다. 그러한 실체적 자아가 없으면 인과윤회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 불교는 윤회설을 주요 교리로 취급해왔다.
기존의 인도 사상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불교 궁극의 목적도 곧 모든 고통, 나아가 근원적인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해탈이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이것을 위해 설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는 길에서 부처님이 가장 중요하게 말씀하신 것은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 자아가 참으로 있다는 생각에서부터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아설 無我說 은 불교의 핵심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불친절한 설명 때문일까? 후학들은 의심한다.
‘자아가 없는데 누가 과보를 받으며, 무엇이 윤회하는가?’
윤회의 주체문제에 있어 무아와 윤회는 양립할 수 있는가, 아니면 결코 양립할 수 없는가? 둘 다 불교의 주요 사상이라면 어떻게 융통시킬 것인가?
누구는 절대 양립불가를 외치며 윤회설은 불교가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양립가능을 말하며 그 길을 ‘아뢰야식, 연기’ 등의 이론을 들어 제시한다.
어떤 이는 윤회설을 윤리적 방편설로 취급하기도 한다.
이렇게 무아와 윤회의 끊임없는 논란이 2천여 년 불교 사상사의 큰 줄기를 차지한다. 그러나 아직도 누구나 공감하는 이론이 없다. 모두 제각각 법에 맞는 합리적 이론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와 윤회설’의 실상임에도 현재 한국불교 안에서는 흔히 숙명적인 윤회설을 마치 진정한 부처님의 교설인 것처럼 가르치고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공부는 특정 교재를 가지고 깊이 있게 접근하기보다는 윤회설의 대략적인 개념 이해를 토대로 스스로 생각하고 정리하여 대중과 함께 나누는 공부를 하려 한다.
윤회설에 대한 자기정리를 원하는 분들이 많이 참여하신다면 더욱 진지한 자리가 될 것이다. 이 공부에 동참하려는 분은 틈나는 대로 윤회에 관한 자료를 미리 찾아보고 정리해 온다면 더욱 내실 있는 공부를 만들 수 있겠다.
불교의 윤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아와 무아, 업과 인과, 아뢰야식, 연기’ 등의 교리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준비할 여유가 없으면 그냥 함께해도 좋다. 그리 어려운 공부는 아닐 것이다.
이번 여름 실상사 재가학림에서 4박 5일의 공부로 혼란한 윤회설을 일도양단하거나 명쾌하게 정답을 내 놓자는 것은 아니다. 이러니저러니 하는 그 장황한 이론들을 다 살펴볼 수도 없다.
윤회설이 부처님의 중요한 가르침이라면, (불교의 핵심사상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미뤄두고) 그 가르침을 폭력적이며 반인륜의 사상으로 몰아가는 숙명론적인 윤회설을 덜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럴 수 있다면 말이다.
삶은 그리울 때 아름답고, 꿈 꿀 때 행복하다.
그리고 거기서 멈춘다면 괴롭지 않으리라.
과거를 아름답게 그리워하고 미래를 행복하게 꿈꾸면 현재가 평화롭다.
그러기 위해 나의 현재 삶에 과거 업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미래에 족쇄를 채우는 종교의 공갈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 지금 내 삶에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는 부처의 눈이 필요하다.
“관세음보살이 매우 열심히 지혜의 길을 수행할 때에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본래 텅 비어 실체가 없음을 알고 난 뒤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버렸다. 수행자여! 세상존재를 이루는 모든 것이 그 모습 그대로 텅 비었음의 모습이요, 텅 비어 실체가 따로 없기에 세상 모든 존재를 이루느니라. 그렇듯이 우리의 정신활동도 그러하니라. 수행자여! 세상 모든 존재의 텅 비어있는 참모습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거나 줄지도 않느니라…” [반야심경]
- 담당
- 행정과 정보전산담당 (☎ 055-960-4240)
- 최종수정일
- 2024.07.23 08:3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