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발언대
자유발언대 이용 안내
- 자유발언대는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게시할 수 있으며 게시된 의견에 대하여는 답변을 하지 않습니다.
- 함양군에 대한 정책제안 및 개선사항은 누리집 내 민원상담(국민신문고) 또는 “군수에게 바란다”를 이용해 주시기 바라며,
채용(구인/구직) 관련 글은 [함양군일자리센터] 누리집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 반복적 게시물, 상업성 광고,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 등의 글은
관리자에 의해 통보없이 차단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함양의잃어버린,1500년전의,역사,가야시대의역사을찾자!.가야시대에,함양은?어떤나라인가?
- 작성일
- 2013-02-24 22:44:46
- 작성자
- 오태규
- 조회수 :
- 137
함양의잃어버린역사!..가야시대의역사을찾자!..1500년전--2000년전의 역사을찾자!..조선시대.함양의,관료와공직자만?..함양인물이냐?..몇개월,군수생활을한.신라,최선생만?..함양인물이냐?..2000년이상의..유구한..함양의역사에서..시련많은..교통,군사의요충지!..함양땅을..역사연구로.재조명..해야된다..상림만이?..유일한 보물이냐?..지리산도..천령산도..팔영치도..오도재도..가야의무덤군도..함양의보물이다!..함양군땅의(대지의)..잊혀진역사을..찾는날이 올때에..함양군의 고전의영령들이..함양군을 아끼고..사랑할것이다..
.....................................................................................................................
함양관동은1500년전,가야국의관청,이있던,마을이다.오씨시조,오첨공이,이마을에사셨다.|○ 함양오씨 역사 소개
오박사(태규) | 조회 1 |추천 0 |2013.02.24. 06:07 http://cafe.daum.net/ohssipeople/I1LP/117
함양관동은 1500년전, 삼국시대에,가야국,이였고
가야국의 교통.군사의 요충지로, 가야국의 관청이 있던 마을이였다.
이곳의 지명이, 이것을 증명해준다.
한국의 오씨의시조, 오첨공이,중국에서,오시어, 최초로 정착하여 사신곳이
함양의관동이다.
오씨역사기록에, 함양관동이, 한국오씨가,최초로 정착하여, 사신곳이라고
기록되어있다.
한국의 오씨들이, 이역사기록을, 오래전부터, 인정하고, 믿고 있기에...
함양관동에...한국오씨들의... 최초동래사적비을...세우는것은?...
중요하고..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함양관동에...넓은 부지(땅)가 마련된다면?...함양군에서..적극적으로..협조한다면?...한국의 많은...오씨들...각종파에서...시조공의..기념비을..세우겠다고...
제안해오고있다...더하여..오래전부터...함양관동에...오첨공..동래사적비...기념비을...세우도록...많은 전국의 오씨들이...제안을 해오고있다.
..............................................................................................................
이러한...상황인데도...앞장서서...추진하는 분이 없어서...
미루기을...수십년이 되었다...
............................................................................................................
함양관동의 가야시대...역사는?...어떻게 기록되어있는가?...
그,역사을 추적하여...보자!...
..............................................................................................................
함양의 가야..사..연구...한국의오씨들은?...가야국에 정착한...오첨공..의..후손이다. 오첨공과.가야역사!...|★오박사(태규)전용방
오박사(태규) | 조회 0 |추천 0 |2013.02.17. 18:57 http://cafe.daum.net/ohssipeople/IdhD/415
//
오첨공은?...가야땅...함양(천령)의 천령산 밑에...관동에 정착하여 살았다..
오첨공이 중국으로...큰아들과 같이 간후에...관동에 남아살던...어머니와
아들이...한국오씨의 시조가된다...
이것이 한국..전체 오씨들의...전설적인... 역사의 이야기다!...
...........................................................................................................
어떻게...이렇게...되었는가?..
..............................................................
우리족보(함양오씨족보) 서에 보면,
신라 지증왕 원년( 500년-501년)에 남해안 해남땅을 통하여
함양땅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라고, 그리고 함양인, 김씨녀 와 결혼하여
2남 1녀 을 낳았다고 되어있읍니다.
여러설이 있으나..우리족보에 많은곳에 나옵니다.
이런 많은 글에 대하여.
합리적이고..확실한 이론을 구축할려면. 그때의 역사적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필요을 느낌니다.. 이런 이유로.
서기 500년 경, 전후의 함양의 역사적 지위가 어떻했는지?..
가야국..신라.백제.고구려. 중국. 일본. 의 역사을 알아보려 합니다.
우선, 함양은 가야국, 땅이 였을 가능성이 크게에
제일 먼저 가야국에 대한 글을 인용.. 이곳에 실는다.
잊혀진역사. 가야의역사.
가야사 개관
李 永 植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 소장)
가야의 역사는 기원전후에 남쪽의 해안지역에서 시작되었고, 6세기 중엽 경에 북쪽의 내륙 지역에서 마감되었습니다. 등의 기록과 고고학 자료를 가지고 보면 약 십이개국 정도의 나라들이 독자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약 600년 동안이나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과 나란히 독립성을 유지하였습니다. 가야가 신라에 통합되는 것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기 100년 전이었습니다. 100년 먼저 망했던 사실과 600년 동안 역사를 함께 했던 사실에서 어디에 의미를 두어야 할지는 분명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런 간단한 산술도 못했기 때문에 가야의 역사를 소홀히 다루어 왔습니다. 우리의 고대사를 삼국시대로 인식한다면 600년 동안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일궈갔던 고대 영남인들의 역사는 어디에서 찾을 것입니까? 우리 역사에서 가야사가 가지는 의미를 새롭게 보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는 가야사가 전개되었던 무대를 해인사의 가야산에서 남해까지, 낙동강 서쪽에 서지리산(섬진강)까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는 낙동강 동쪽의 동래· 양산·창녕 등과 섬진강 서쪽의 진안·장수·임실·남원 등에서도 가야문화의 흔적들이 확 인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경남과 부산을 중심으로 경북과 전북의 약간을 포함하는 지역에서 가야사는 전개되었습니다. 많은 산과 강으로 나누어진 분지들은 독립적인 가야의 여러나라 들의 형성과 발전에 적합했지만, 통일된 왕국을 이루기도 어렵게 하였습니다. 가야는 통일왕국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가야(加 耶)는 가라(加羅)에서 온 말입니다. 가라는 우리말에서 산자락과 들에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하였는데, 이후는 정치체를 가리키는 말로 되었습니다. 김해의 가락국(駕洛國)은 '가라의 나라'였습니다. 가야의 한자표기는 加耶(신라)→伽耶(고려)→伽倻(조선)와 같이, 시대가 내려오 면서 사람 인(人)변이 하나씩 더해졌습니다.
는 3세기 경에 경남에 산재했던 12개 의 가야국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구야국(狗邪國, 김해)·안야국(安邪國, 함안)·반로국(半路 國, 고령)·불사국(不斯國, 창녕)·독로국(瀆盧國, 거제)·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밀 양)·고순시국(古淳是國, 창원)·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성) 등이 가야인들이 사용했던 나라 이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금관가야(金官加耶, 김해)·아나가야(阿那加耶, 함안)와 같은 이름이 친숙합니다만, 고려시대의 일연스님이 고려시대의 행정구역명에 가야를 붙여 지었던 이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정작 가야인들은 이런 이름들은 몰랐을 겁니다. 가야의 각국은 구야국·안야국·반로국 등과 같이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임나(任那)는 에 주로 쓰여 고대 일본이 가야를 지배했다고 꾸미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임나는 「광개토왕릉비(400년)·삼국사기 강수전(7세기)·진경대사비(932년)」와 같이 고구려인과 신라인들도 사용하였습니다. 임나는 '님의 나라(主國)'입니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중심국이었던 김해의 가락국이나 고령의 대가야를 높여 부르던 말이었습니다. 김 해와 고령은 가야의 대표로 일본과 교섭했기 때문에 고대 일본에서 임나는 가야의 대명사로 도 사용되었습니다. 대가야(大加耶)는 고령의 가야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이지만, 원래의 대가야는 둘이 있었습니다.
1∼4세기에는 김해의 가락국이 '큰가야(大加耶)'였고, 5∼6세기에 는 고령의 반로국이 '큰가야(大加耶)'였습니다. 가야사에서 마지막 '큰가야'가 반로국이었기 때문에 고령을 대가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가야의 역사는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나누어 집니다. 40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가야를 공격했던 사건을 중심으로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나눕니다. 전기 가야에는 김해의 가락국이, 후기가야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중심세력이었습니다.
전기가야는 남해안에 인접한 거제(瀆盧國)·김해(狗邪國)·창원(古淳國·卓淳國)·함안(安邪國)·고성(古 自國)등이 번성하였고, 후기가야는 고령(大加耶)·합천(多羅國)·창녕(不斯國·比斯國)·의령 (爾赦國)·거창(居烈國)·남원(己汶國)·하동(多沙國)·사천(史勿國) 등이 가야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기원전후의 시기에 김해를 비롯한 창원·마산·함안·고성·사천·진주 등의 지역에서는 소규모의 정치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가야사의 시작이었습니 다.
대개는 3천∼3천5백명 가량의 '소국(小國)'들이었으나, 김해의 구야국(狗邪國)과 함안의 안야국(安邪國)은 2만∼2만5천명 정도의 '대국(大國)'이었습니다. 남해안에서 가야사가 시작 된 것은 낙랑군·대방군(樂浪郡·帶方郡)과 같은 선진지역과 바닷길을 통해 교섭을 하고 있 었기 때문입니다. 는 3세기경에 대방군에서 일본열도에 이르는 해상교통로를 기록 하고 있습니다. 황해도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남해에 접어들어 동쪽으로 향하다가, 김해의 구야국에 정박한 다음, 대한해협을 건너 쓰시마(對馬島)를 거쳐 큐슈(九州)에 도착하 는 항로였습니다.
이는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었던 한(漢)의 선진문물이 이동하던 경로 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남해에 인접해 있던 가야의 소국들은 이러한 선진문물 이동로의 관 문과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 들였고, 이를 바탕으로 발 전할 수 있었습니다. 김해의 대성동고분군·양동고분군, 창원의 다호리유적, 고성의 동외동 패총, 울산의 하대고분군 등에서는 이러한 경로로 수입되었던 중국제 문물들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전기가야 소국들의 발전에는 중국군현과의 외교와 교역이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하 였습니다. 가 전하는 '포상팔국(浦上八國, 201∼212년)의 난'은 사천· 고성·칠원·마산 등의 가야가 김해의 해상교역권을 빼앗기 위해 가락국을 공격했던 전쟁이 었습니다. 우리는 가야의 건국신화를 바탕으로 형제관계와 같이 이해하고 있지만, 같은 가야 문화권이라도 이해관계에 따라서는 전쟁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313·314년에 고구려에게 낙랑군과 대방군이 축출되면서 남해안의 가야에 선진문물의 공급 원이 차단되었습니다.
40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가야를 공략하였습니다. 이러한 1세기간의 역사적 변동은 가야사의 중심이 남부의 해안지역에서 북부의 내륙지역으로 이동하게 하였습니다.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전개된 후기가야는 가야금 12곡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라국왕 하지(加羅國王荷知)'의 남제(南齊)와의 외교에 대한 해석, 대가야식 토기와 문물의 확산에 대한 고고학적 해석 등을 통한 대가야사의 복원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5세기 중후엽에 대가야의 가실왕은 우륵에게 가야금 12곡을 작곡시켰습니다. 가 전하는 가야 금 12곡명은 연주곡과 무곡 등으로 구성된 음악으로 해석되어왔습니다만, 최근에 가야금 12곡명은 서부경남의 가야 여러 나라들의 이름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대가야가 정치적 영향을 미쳤던 산물이 가야금 12곡이었습니다. 고령의 대가야왕은 의령의 사이기국(斯二岐國) 사 람 우륵(于勒)을 강제 이주시켜 작곡을 시킬 수 있었고, 가야금 12곡에 서부 경남의 가야들을 포함시키는 정치적 통합체를 추진하였습니다. 대가야왕은 축제의 마당에 가야왕들을 불러모았고, 가야금 12곡을 연주케 하여 가야의 일체감을 높였습니다. 479년에 대가야왕은 중국의 남제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여 '輔國將軍·本國王'에 제수되었습니다. 내륙에 위치한 대 가야(고령)의 사절단이 중국의 양자강에 이르려면 먼저 남해로 나와야 합니다. 고령에서 남 해로 나오는 길은 낙동강과 섬진강이 있지만, 당시의 낙동강 하류역은 신라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대가야에서 섬진강 하구(하동)에 도달하려면 고령→합천→거창→함양→남원 (운봉)의 육로와 남원→곡성→구례→하동의 섬진강을 경유하였을 것입니다.
5세기 후반의 대가 야왕은 이러한 지역에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가야 사절단은 중국의 남제에 도 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물적증거가 서부 경남지역에 대가야식 토기와 문물이 확산되는 현상과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내용입니다. 대가야식 토기와 금동제 위세품등이 서부경남 일대로 확산되는 과정은 경제교역권(5C중엽)→간접지배권(5C후엽)→직접지배권(6C 초)의 단계로 나누어 집니다. 고령의 지산동44호분은 중앙의 주인공을 방사식으로 둘러싸듯 이 35개의 돌방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무려 100인 이상을 강제로 죽여 순장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6세기의 대가야는 고대국가의 출발점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6세기 전반부터 가야는 신라와 백제의 침입에 휘말리게 됩니다. 에는 당시의 사정이 자세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신라와 백제의 진출에 대해 독립유지를 위해 전쟁과 외교를 전개하는 가야의 노력은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가야는 친백제노선과 친신라노선을 반복하기도 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임나일 본부(任那日本府)의 문제가 생기는 것도 이 시기입니다.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일본의 왜왕권 이 가야에 파견했던 외교사절입니다만, 이들은 가야의 왕들과 보조를 맞춰가며 백제나 신라 에 대한 외교활동을 벌였습니다.
안라국왕은 함안에 이들을 머물게 하면서 백제와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왜를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532년에 가락국(김해), 560경에 안라국(함안), 562년에 대가야(고령)가 차례로 신라의 회유와 무력앞 에 통합되었고, 가야의 역사는 한국고대사의 울타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야인들의 일부는 일본열도로 이주하기도 하였고, 신라의 지방사람으로 편제되기도 하였으나, 김유신 일족과 같이 정복국인 신라에서 최고 권력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함양의 천령산과 관동이 남원으로 가는 옛길에 있는,, 함양읍 최초의
마을이고,.. 전략적마을이고..관청과 군사막사가 있었다고..전해지는
마을 입니다.. 그렇기에...오첨공이 이곳에 서기500년경에 사신 이유가
됩니다...21년사셨는데...귀화하기 전년에...김해..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었기에...대가야나라가 불안하고...이런이유로...귀화을 하지
않았겠느냐?... 그런 추측을 해봅니다....
오첨공이 귀화한후에...약30년이되어..고령의 대가야도 신라에 병합이
되어.. 가야의역사와 함양의역사는.. 신라의역사로 바뀌고...년호도
신라왕의 년호로 바뀌어... 고려시대에 기록에 남기게 된다...
이렇게 관동과 오첨공의 역사가 이루어 진것이 아닐까?...
상상을 해봅니다.... 오 태 규... 씀
.....................................................................................................................
함양관동은1500년전,가야국의관청,이있던,마을이다.오씨시조,오첨공이,이마을에사셨다.|○ 함양오씨 역사 소개
오박사(태규) | 조회 1 |추천 0 |2013.02.24. 06:07 http://cafe.daum.net/ohssipeople/I1LP/117
함양관동은 1500년전, 삼국시대에,가야국,이였고
가야국의 교통.군사의 요충지로, 가야국의 관청이 있던 마을이였다.
이곳의 지명이, 이것을 증명해준다.
한국의 오씨의시조, 오첨공이,중국에서,오시어, 최초로 정착하여 사신곳이
함양의관동이다.
오씨역사기록에, 함양관동이, 한국오씨가,최초로 정착하여, 사신곳이라고
기록되어있다.
한국의 오씨들이, 이역사기록을, 오래전부터, 인정하고, 믿고 있기에...
함양관동에...한국오씨들의... 최초동래사적비을...세우는것은?...
중요하고..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함양관동에...넓은 부지(땅)가 마련된다면?...함양군에서..적극적으로..협조한다면?...한국의 많은...오씨들...각종파에서...시조공의..기념비을..세우겠다고...
제안해오고있다...더하여..오래전부터...함양관동에...오첨공..동래사적비...기념비을...세우도록...많은 전국의 오씨들이...제안을 해오고있다.
..............................................................................................................
이러한...상황인데도...앞장서서...추진하는 분이 없어서...
미루기을...수십년이 되었다...
............................................................................................................
함양관동의 가야시대...역사는?...어떻게 기록되어있는가?...
그,역사을 추적하여...보자!...
..............................................................................................................
함양의 가야..사..연구...한국의오씨들은?...가야국에 정착한...오첨공..의..후손이다. 오첨공과.가야역사!...|★오박사(태규)전용방
오박사(태규) | 조회 0 |추천 0 |2013.02.17. 18:57 http://cafe.daum.net/ohssipeople/IdhD/415
//
오첨공은?...가야땅...함양(천령)의 천령산 밑에...관동에 정착하여 살았다..
오첨공이 중국으로...큰아들과 같이 간후에...관동에 남아살던...어머니와
아들이...한국오씨의 시조가된다...
이것이 한국..전체 오씨들의...전설적인... 역사의 이야기다!...
...........................................................................................................
어떻게...이렇게...되었는가?..
..............................................................
우리족보(함양오씨족보) 서에 보면,
신라 지증왕 원년( 500년-501년)에 남해안 해남땅을 통하여
함양땅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라고, 그리고 함양인, 김씨녀 와 결혼하여
2남 1녀 을 낳았다고 되어있읍니다.
여러설이 있으나..우리족보에 많은곳에 나옵니다.
이런 많은 글에 대하여.
합리적이고..확실한 이론을 구축할려면. 그때의 역사적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필요을 느낌니다.. 이런 이유로.
서기 500년 경, 전후의 함양의 역사적 지위가 어떻했는지?..
가야국..신라.백제.고구려. 중국. 일본. 의 역사을 알아보려 합니다.
우선, 함양은 가야국, 땅이 였을 가능성이 크게에
제일 먼저 가야국에 대한 글을 인용.. 이곳에 실는다.
잊혀진역사. 가야의역사.
가야사 개관
李 永 植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 소장)
가야의 역사는 기원전후에 남쪽의 해안지역에서 시작되었고, 6세기 중엽 경에 북쪽의 내륙 지역에서 마감되었습니다. 등의 기록과 고고학 자료를 가지고 보면 약 십이개국 정도의 나라들이 독자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약 600년 동안이나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과 나란히 독립성을 유지하였습니다. 가야가 신라에 통합되는 것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기 100년 전이었습니다. 100년 먼저 망했던 사실과 600년 동안 역사를 함께 했던 사실에서 어디에 의미를 두어야 할지는 분명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런 간단한 산술도 못했기 때문에 가야의 역사를 소홀히 다루어 왔습니다. 우리의 고대사를 삼국시대로 인식한다면 600년 동안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일궈갔던 고대 영남인들의 역사는 어디에서 찾을 것입니까? 우리 역사에서 가야사가 가지는 의미를 새롭게 보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는 가야사가 전개되었던 무대를 해인사의 가야산에서 남해까지, 낙동강 서쪽에 서지리산(섬진강)까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는 낙동강 동쪽의 동래· 양산·창녕 등과 섬진강 서쪽의 진안·장수·임실·남원 등에서도 가야문화의 흔적들이 확 인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경남과 부산을 중심으로 경북과 전북의 약간을 포함하는 지역에서 가야사는 전개되었습니다. 많은 산과 강으로 나누어진 분지들은 독립적인 가야의 여러나라 들의 형성과 발전에 적합했지만, 통일된 왕국을 이루기도 어렵게 하였습니다. 가야는 통일왕국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가야(加 耶)는 가라(加羅)에서 온 말입니다. 가라는 우리말에서 산자락과 들에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하였는데, 이후는 정치체를 가리키는 말로 되었습니다. 김해의 가락국(駕洛國)은 '가라의 나라'였습니다. 가야의 한자표기는 加耶(신라)→伽耶(고려)→伽倻(조선)와 같이, 시대가 내려오 면서 사람 인(人)변이 하나씩 더해졌습니다.
는 3세기 경에 경남에 산재했던 12개 의 가야국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구야국(狗邪國, 김해)·안야국(安邪國, 함안)·반로국(半路 國, 고령)·불사국(不斯國, 창녕)·독로국(瀆盧國, 거제)·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밀 양)·고순시국(古淳是國, 창원)·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성) 등이 가야인들이 사용했던 나라 이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금관가야(金官加耶, 김해)·아나가야(阿那加耶, 함안)와 같은 이름이 친숙합니다만, 고려시대의 일연스님이 고려시대의 행정구역명에 가야를 붙여 지었던 이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정작 가야인들은 이런 이름들은 몰랐을 겁니다. 가야의 각국은 구야국·안야국·반로국 등과 같이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임나(任那)는 에 주로 쓰여 고대 일본이 가야를 지배했다고 꾸미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임나는 「광개토왕릉비(400년)·삼국사기 강수전(7세기)·진경대사비(932년)」와 같이 고구려인과 신라인들도 사용하였습니다. 임나는 '님의 나라(主國)'입니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중심국이었던 김해의 가락국이나 고령의 대가야를 높여 부르던 말이었습니다. 김 해와 고령은 가야의 대표로 일본과 교섭했기 때문에 고대 일본에서 임나는 가야의 대명사로 도 사용되었습니다. 대가야(大加耶)는 고령의 가야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이지만, 원래의 대가야는 둘이 있었습니다.
1∼4세기에는 김해의 가락국이 '큰가야(大加耶)'였고, 5∼6세기에 는 고령의 반로국이 '큰가야(大加耶)'였습니다. 가야사에서 마지막 '큰가야'가 반로국이었기 때문에 고령을 대가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가야의 역사는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나누어 집니다. 40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가야를 공격했던 사건을 중심으로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나눕니다. 전기 가야에는 김해의 가락국이, 후기가야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중심세력이었습니다.
전기가야는 남해안에 인접한 거제(瀆盧國)·김해(狗邪國)·창원(古淳國·卓淳國)·함안(安邪國)·고성(古 自國)등이 번성하였고, 후기가야는 고령(大加耶)·합천(多羅國)·창녕(不斯國·比斯國)·의령 (爾赦國)·거창(居烈國)·남원(己汶國)·하동(多沙國)·사천(史勿國) 등이 가야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기원전후의 시기에 김해를 비롯한 창원·마산·함안·고성·사천·진주 등의 지역에서는 소규모의 정치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가야사의 시작이었습니 다.
대개는 3천∼3천5백명 가량의 '소국(小國)'들이었으나, 김해의 구야국(狗邪國)과 함안의 안야국(安邪國)은 2만∼2만5천명 정도의 '대국(大國)'이었습니다. 남해안에서 가야사가 시작 된 것은 낙랑군·대방군(樂浪郡·帶方郡)과 같은 선진지역과 바닷길을 통해 교섭을 하고 있 었기 때문입니다. 는 3세기경에 대방군에서 일본열도에 이르는 해상교통로를 기록 하고 있습니다. 황해도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남해에 접어들어 동쪽으로 향하다가, 김해의 구야국에 정박한 다음, 대한해협을 건너 쓰시마(對馬島)를 거쳐 큐슈(九州)에 도착하 는 항로였습니다.
이는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었던 한(漢)의 선진문물이 이동하던 경로 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남해에 인접해 있던 가야의 소국들은 이러한 선진문물 이동로의 관 문과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 들였고, 이를 바탕으로 발 전할 수 있었습니다. 김해의 대성동고분군·양동고분군, 창원의 다호리유적, 고성의 동외동 패총, 울산의 하대고분군 등에서는 이러한 경로로 수입되었던 중국제 문물들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전기가야 소국들의 발전에는 중국군현과의 외교와 교역이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하 였습니다. 가 전하는 '포상팔국(浦上八國, 201∼212년)의 난'은 사천· 고성·칠원·마산 등의 가야가 김해의 해상교역권을 빼앗기 위해 가락국을 공격했던 전쟁이 었습니다. 우리는 가야의 건국신화를 바탕으로 형제관계와 같이 이해하고 있지만, 같은 가야 문화권이라도 이해관계에 따라서는 전쟁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313·314년에 고구려에게 낙랑군과 대방군이 축출되면서 남해안의 가야에 선진문물의 공급 원이 차단되었습니다.
40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가야를 공략하였습니다. 이러한 1세기간의 역사적 변동은 가야사의 중심이 남부의 해안지역에서 북부의 내륙지역으로 이동하게 하였습니다.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전개된 후기가야는 가야금 12곡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라국왕 하지(加羅國王荷知)'의 남제(南齊)와의 외교에 대한 해석, 대가야식 토기와 문물의 확산에 대한 고고학적 해석 등을 통한 대가야사의 복원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5세기 중후엽에 대가야의 가실왕은 우륵에게 가야금 12곡을 작곡시켰습니다. 가 전하는 가야 금 12곡명은 연주곡과 무곡 등으로 구성된 음악으로 해석되어왔습니다만, 최근에 가야금 12곡명은 서부경남의 가야 여러 나라들의 이름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대가야가 정치적 영향을 미쳤던 산물이 가야금 12곡이었습니다. 고령의 대가야왕은 의령의 사이기국(斯二岐國) 사 람 우륵(于勒)을 강제 이주시켜 작곡을 시킬 수 있었고, 가야금 12곡에 서부 경남의 가야들을 포함시키는 정치적 통합체를 추진하였습니다. 대가야왕은 축제의 마당에 가야왕들을 불러모았고, 가야금 12곡을 연주케 하여 가야의 일체감을 높였습니다. 479년에 대가야왕은 중국의 남제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여 '輔國將軍·本國王'에 제수되었습니다. 내륙에 위치한 대 가야(고령)의 사절단이 중국의 양자강에 이르려면 먼저 남해로 나와야 합니다. 고령에서 남 해로 나오는 길은 낙동강과 섬진강이 있지만, 당시의 낙동강 하류역은 신라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대가야에서 섬진강 하구(하동)에 도달하려면 고령→합천→거창→함양→남원 (운봉)의 육로와 남원→곡성→구례→하동의 섬진강을 경유하였을 것입니다.
5세기 후반의 대가 야왕은 이러한 지역에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가야 사절단은 중국의 남제에 도 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물적증거가 서부 경남지역에 대가야식 토기와 문물이 확산되는 현상과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내용입니다. 대가야식 토기와 금동제 위세품등이 서부경남 일대로 확산되는 과정은 경제교역권(5C중엽)→간접지배권(5C후엽)→직접지배권(6C 초)의 단계로 나누어 집니다. 고령의 지산동44호분은 중앙의 주인공을 방사식으로 둘러싸듯 이 35개의 돌방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무려 100인 이상을 강제로 죽여 순장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6세기의 대가야는 고대국가의 출발점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6세기 전반부터 가야는 신라와 백제의 침입에 휘말리게 됩니다. 에는 당시의 사정이 자세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신라와 백제의 진출에 대해 독립유지를 위해 전쟁과 외교를 전개하는 가야의 노력은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가야는 친백제노선과 친신라노선을 반복하기도 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임나일 본부(任那日本府)의 문제가 생기는 것도 이 시기입니다.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일본의 왜왕권 이 가야에 파견했던 외교사절입니다만, 이들은 가야의 왕들과 보조를 맞춰가며 백제나 신라 에 대한 외교활동을 벌였습니다.
안라국왕은 함안에 이들을 머물게 하면서 백제와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왜를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532년에 가락국(김해), 560경에 안라국(함안), 562년에 대가야(고령)가 차례로 신라의 회유와 무력앞 에 통합되었고, 가야의 역사는 한국고대사의 울타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야인들의 일부는 일본열도로 이주하기도 하였고, 신라의 지방사람으로 편제되기도 하였으나, 김유신 일족과 같이 정복국인 신라에서 최고 권력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함양의 천령산과 관동이 남원으로 가는 옛길에 있는,, 함양읍 최초의
마을이고,.. 전략적마을이고..관청과 군사막사가 있었다고..전해지는
마을 입니다.. 그렇기에...오첨공이 이곳에 서기500년경에 사신 이유가
됩니다...21년사셨는데...귀화하기 전년에...김해..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었기에...대가야나라가 불안하고...이런이유로...귀화을 하지
않았겠느냐?... 그런 추측을 해봅니다....
오첨공이 귀화한후에...약30년이되어..고령의 대가야도 신라에 병합이
되어.. 가야의역사와 함양의역사는.. 신라의역사로 바뀌고...년호도
신라왕의 년호로 바뀌어... 고려시대에 기록에 남기게 된다...
이렇게 관동과 오첨공의 역사가 이루어 진것이 아닐까?...
상상을 해봅니다.... 오 태 규... 씀
- 담당
- 행정과 정보전산담당 (☎ 055-960-4240)
- 최종수정일
- 2024.07.23 00: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