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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의...잃어버린...500년간의...역사을찾자...이길이..함양군을..사랑하는길이다...
- 작성일
- 2014-02-17 22:26:11
- 작성자
- 오태규
함양군의..가야시대..유물을..찾고..발굴하여..함양군의..진정한..가야국역사을..찾아서..함양.2000년간의역사을,만들자!...|○ 자유게시판
오박사(태규) | 조회 0 |추천 0 |2014.02.17. 22:13 http://cafe.daum.net/ohssipeople/IdhT/1402
함양군의...잊어버린...가야시대의...유물을..찾고..발굴하여...
함양군의...진정한,역사...가야국,역사을찾아서...
함양군의...함양,2000년간의,역사을...찾고...만들자...
이길이...진정으로...함양군을..사랑하는것이다...
함양군의...잃어버린...500년간(서기40년--서기560년)의...역사을찾는길이...함양군의..역사을..아끼고..사랑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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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의...가야시대...유물...전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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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백 함양성심병원장, 소장품 박물관에 기증
(경남 함양=뉴스1) 김성진 기자
입력 2013.11.13 16:04:25
함양성심병원 정순백 원장이 기증한 가야시대 목걸이. (함양군 제공)(c) News1
(경남 함양=뉴스1) 김성진 기자 = 경남 함양군은 성심병원 정순백 원장이 지난 30여년 동안 수집해 온 유물 332점을 함양박물관에 기증했다고 13일 밝혔다.
정 원장은 함양지역의 유물이 다른 지역으로 나가는 것을 염려해 유물을 수집·보관해 오다 이번에 함양박물관에 유물을 흔쾌히 기증했다.
기증 유물은 함양박물관에는 없는 가야시대 목걸이를 비롯해 토기, 석기, 청동합 등 귀중한 역사적 자료들이다.
함양군은 그동안 유물 기증 및 기탁운동을 실시해 고문서, 목판, 도자기, 토기 등 1600여점을 기증기탁 받아 보관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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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성심병원 정순백 원장은 지난 10월 31일 30여 년 동안 수집해 온 유물 332점을 함양박물관에 기증했다.
정순백 원장은 함양의 유물이 다른 지역으로 나가는 것을 염려해 전 고미회 회원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함양관련 유물을 수집하고 보관, 관리해 오다 이번에 함양박물관에 흔쾌히 유물을 기증했다.
이번에 기증한 유물은 함양박물관에 수집되지 않은 가야시대 목걸이를 비롯한 토기, 석기, 청동합 등의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일부는 박물관 개관 시 전시될 예정이며 그 외 유물들은 특별전을 통해 전시될 계획에 있다.
함양군에서는 그동안 유물 기증 및 기탁운동을 실시해 고문서, 목판, 도자기, 토기 등 1,600여점을 기증기탁 받아 보관해 오고 있다.
유물 기증 및 기탁 문의는 함양군 시설관리사업소(☎960-5532)로 문의하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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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기념물 제171호 함양백천리고분군 (咸陽白川里古墳群) 경상남도 / 문화재및(문화재청자료기초)
2013/12/2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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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고분군
수량/면적
20,727㎡
지정(등록)일
1997.12.31
소 재 지
경남 함양군 함양읍 백천리 산11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함양군
관리자(관리단체)
함양군
상 세 문 의
경상남도 함양군 문화관광과 055-960-5162
함양백천리고분군에 대한 설명입니다.
백천리 척지마을 남계천 옆의 낮은 구릉지대에 분포한 가야시대의 무덤들이다.
발견된 무덤의 수는 무덤 5기와 그 주변에 있는 작은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21기이다. 고분은 둥근 봉분이 남아 있고 묘제는 네모꼴이다. 옆벽은 모두 냇돌로 쌓았고 주실의 동쪽이나 서쪽에 반드시 구덩식돌덧널로 된 부곽을 나란히 배치하여 주실과 부곽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다곽묘이다. 고분 주위에 퍼져 있는 작은 구덩식돌덧널무덤은 크게 파괴되어 완전하게 모습이 남아 있는 예는 하나도 없으며 역시 냇돌로 쌓은 일반적인 형태이다. 유물은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 등 200여 점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이 토기이다. 연대는 대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로 추정한다.
함양 백천리무덤들은 지금까지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가야소국 하나가 이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이 지방 무덤과 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 경상남도 기념물 제171호 함양백천리고분군 (咸陽白川里古墳群) |작성자 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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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상백리...고분군에서...철갑옷...출토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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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무덤에 부장된 철기의 양과 질이 인접국가의 것보다 우월했기 때문에 타 국가들은 가야와 교역을 하거나 자신의 영향력하에 두려고 경쟁하기도 했다. 그래서 가야의 여러 나라는 통치수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철제 무기를 개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가야지역의 철의 생산수준은 양적으로 풍부하고 이를 다루는 기술도 단연 앞서있고 우수하여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활, 화살, 검, 도끼, 갑주 등의 무기들의 기본 소재는 거의 철을 이용하여 제작된 것이다.
자 이제 가야 철갑옷부터 살펴 보기로 하자.
함양군 상백리 고분에서 가야의 갑옷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어깨, 가슴, 허리 등 흉복부만을 가리게 마련된 철판제 였다. 고령 지산동 32호분에서 출토된 철제단갑은 목을 보호하기 위한 경갑과 가슴 및 등을 보호하기 위한 단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갑은 반원 모양으로 도려낸 장방형 철판 2매를 맞붙이게 되어 있으며 단갑은 배판과 좌우 흉판의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야시대의 갑옷에는 철판을 쇠못으로 이어붙인 이른바 단갑과 수많은 소팔을 꿰붙여서 만든 찰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의 찰갑은 몸 전체를 소찰로 꿰붙여 온 몸을 뒤덮은 갑옷은 드물고 팔 아래 부분에 따로 토시를 끼었고 단갑을 입을 경우 보병은 따로 정강이대기를 끼었다(경주의 여러 고분에서도 갑옷의 철조각이 출토되었는데 이 갑옷의 철조각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찰갑편과 똑같은 것이며 상.중.하의 세 부분에 작은 구멍이 뚫려져 나란히 꿰매게 되어 있다).
철갑의 두께는 1mm정도이고 경첩을 통해 열었다 닫았다 입고 벗기 편하게 되어 있어 생각보다 무겁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그래서 가야철갑옷은 가야 군인이 몸통은 물론 목·팔·머리 등의 보호 가리개로 활용한 것이다. 철갑옷은 쇠를 재료로 하는 복합 구조물이다.
그래서 가야인들은 철갑을 제련하기 위해 철광석과 숯을 함께 섞어 녹이는 방법을 썼다. 쇠는 1500℃에서 녹지만 숯을 넣으면 1300℃에서 녹는 까닭에 철갑을 만듦에 있어 즐겨 사용한 것이다. 이렇게 만든 판갑을 쇠집게(단야구)·망치 등을 사용하여 두드려 원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단조품인만큼 불로 쇠를 다져 강하게 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27개 조각을 입체적으로 연결하고 3차원 곡면으로 만들어 철갑옷으로 완성한 것이다. 또한 8㎝간격으로 구멍을 뚫고 통풍도 되고 땀이 채이는 것을 막도록 했다. 판갑틀은 대량 생산을 위한 모형틀로 가야철갑옷의 통일을 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갑옷의 종류도 여럿인데 종갑판 갑옷·비늘갑옷·삼각판협철제 갑옷·삼각판정결 갑옷 등으로 다양했다. 뿐만 아니다. 가야 가마인물상토기나 함안 철마갑 등 가야 유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도 얼굴가리개·재갈 등에 철을 사용한 것이다. 이렇게하여 철로 중무장한 기마전단을 보유하였던 것이다.
그랬기에 1세기 후반 신라 파사이사금 시절 신라가 5천 군사를 보내고 나중에는 정병 1만을 출동시켜 상대해야 할 나라였던 것이며 4세기까지는 신라와 팽팽한 힘의 관계를 유지했고 더러는 신라보다도 힘에서 더 강력했던 것이다(삼국사기에서 가야의 전력과 승리를 애써 기록하지 않은 것은 이 책이 신라중심에서 쓴 것이라서 그렇다). 그러나 가야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서기 400년 고구려·신라 연합군이 왜(倭)도 포함된 가야 주축군에 완승한 것이다.
원래 전쟁초기에는 가야가 일방적인 승리를 이어갔고 신라는 패배 일보 직전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고, 중원과 몽골초원 등으로 정복에 나서고 있던 고구려 입장에서도 후방의 안정이 필요했던지라 자국에 조공을 하던 신라를 돕고자 나선 것이다. 이렇게하여 고구려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은 5만의 대군으로 물밀 듯이 내려와 금관가야(임라가야)를 격파했고 항복까지 받아낸 것이다(당시 고구려군의 주력이 기마부대와 철기군이었던지라 5만이라면 엄청난 전력으로 봐야 함).
당시 이 전쟁은 5세기의 판도를 결정한 최대의 국제전이기도 했다. 광개토비에 나오는 서기 400년 5만 군사를 파병해서 한반도 남부를 돌진하여 물리친 왜는 가야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광개토의 공덕을 높이고자 같은 민족인 가야라고 하기보다 왜라는 비하적인 말을 사용한 듯하다. 그런데 어쨌든 이 전쟁으로 가야는 군사력의 기반을 잃고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가야는 고대국가로 발전 못한 것이 아니라 강성한 국가로 발전해 가다 고구려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아울러 이후에는 김해 대성동 고분의 출토에서 보듯 철갑옷은 사라진다. 즉 금관가야의 몰락과 함께 없어져간 것이다. 그후 가야인들은 일본으로 갔다. 그래서 5세기 이후 일본에는 가야 철갑옷이 갑자기 도입되었고 폭발적인 증가세와 질적 진보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가야토기도 스에키토기로 전환되면서 일본 전역에 퍼졌다.
또한 5세기 이후 한반도 내에 있던 가야인들은 고령지역의 대가야에 합세했다. 이에 따라 대가야가 강력하게 등장했고 5세기 이후에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가야 철갑옷들이 등장하고 급속도로 퍼져 나간 것이다.
원래 가야지역은 쇠가 풍부했는데 덩이쇠(철정)도 넉넉해서 쇠를 즐겨 활용한 것이다. 특히 김해와 인근한 물금광산은 가장 대표적인 곳이다. 당시 덩이쇠는 중국·일본 등지로 수출되기도 했는데 가야인들은 일본개척과 더불어 일본으로도 건너가 철을 전혀 다룰 줄 모르던 일본 원주민들에게 철을 귀중히 사용토록 깨우치기도 했다.
특히 제련술과 야금술의 발달과 함께 군사용 무기를 확충하고 철갑기마병을 길러 강한 군사력의 토대로도 삼아 생산과 배분을 장악했다(당시 다른 지역은 가죽갑옷이 주종을 이룬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그랬기에 초기에는 신라의 조공을 받는 등 신라에 대해 더욱 우세한 위치에 있기도 하고 일본을 정복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 가야 철갑옷 |작성자 현경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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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한국사의 고대국가 가야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외의 용례에 대해서는 가야/동음이의어 문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newstown.co.kr/file_news/newstown_old/images/2004-10-31/c_20041031_15238_21684.jpg?width=600
[JPG external image]
가야의 토기. 일본의 스에키 토기와 거의 흡사하다.[1]
gaya_gold.jpg
가야의 금 장식.
http://sunchunkim.com.ne.kr/images/1589_0.gif?width=250
[GIF external image]
전기 가야연맹 지도
공식명칭 伽倻,任那[2]
위치 경상남도 일대와 전라남도 일대
인구
수도 연맹국별로 존재.[3]
정치체제 군주정
국가원수 王, 旱岐[4]
언어 마한어
종족 예족,맥족,한족, 토착민 등
종교 불교 등
존속기간 ? ~ 562년[5]
성립 이전 변한
멸망 이후 백제,신라
Contents
1 개요 2 제국설과 연맹설의 차이 3 역사와 특징 3.1 주거 4 임나일본부설 5 가야연맹 구성국 5.1 금관국(구야국, 금관가야) 5.2 반파국 5.3 고령가야 5.4 다라국(多羅國) 5.5 초팔국(草八國) 5.6 비자벌(比自火) 5.7 성산가야(星山加耶) 5.8 안라국(安羅國) 5.9 탁순국(卓淳國) 6 관련 항목
[edit]
1 개요 ¶
삼한의 하나였던 변한(弁韓)으로부터 기원한 한반도 남부의 여러 국가들의 총칭. 에는 6개의 나라가, 에는 10개의 나라가, 에는 24개 나라가 거론되고 있다. 2세기경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3세기에 무역으로 많은 부를 누렸지만, 멸망할 때까지 하나의 통일된 정치단위를 이룬 적이 없었으며, 5세기 후반 이후에는 강대해지는 백제와 신라 두 나라의 사이에 끼어 허덕이다가 하나하나 신라에 항복 또는 흡수되었다.
[edit]
2 제국설과 연맹설의 차이 ¶
http://db.kookje.co.kr/news2000/photo/Data_Images/desk/20036/115715_LImage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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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맹설에 근거하여 제작된 가야의 지도.
가야 제국이지만, 帝國이 아니라 諸國이다. 주로 가야연맹이라고 더 잘 알려져 있다. 위치상으로는 현재의 경상남도 서부 일대가 이에 해당된다.[6]
지금까지 가야의 정치 체제로 '연맹 왕국설'이 정설이었으나[7] 2007년 이후에는 '가야 제국(諸國)설' 쪽으로 정설이 변경되고 있는데, 이 학설에 따르면 가야 국가들은 연맹 형태로 연결된 국가가 아니라 국명만 유사한 독립된 별개 국가로 따로 나뉜다. 장기간의 연맹 체계는 불가능하다는 점과 연맹 관계를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이유로 등장한 학설. 심지어 포상팔국의 난의 경우엔 저멀리 마한의 일부인 서해안의 보라국까지 참여해 있으니... 90년대 이후 고고학적 발견의 진전으로 서서히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고 있는 학설이다.
다들 금관가야, 대가야, 안라가야 등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XX가야로 불린건 태조 왕건이 가야지역 일대 호족들에게 XX 가야라는 명칭을 부여하면서 옛 가야시대 이름인양 와전된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참조해보면,
5.가야
가락기 찬에 이르기를
"한줄기 붉은 끈이 드리워지며/둥근 달 여섯 개가 떨어졌네./다섯은 각기 제 고을로 돌아가고/하나가 이 성에 머물렀네"
라고 했다. 그 하나가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은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으니, 금관국이 이 다섯 가운데 들어가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본조의 사략에는 금관까지 아울러 그 수에 넣고 왕명을 기록했으니 잘못 된 것이다.
아라가야와 고령가야와 대가야와 성산가야와 소가야이다. 또 본조 사략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태조 천복 5년 경자(940)에 다섯 가야의 이름을 고쳐 1은 금관, 2는 고령, 3은 비화로,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으로 했다.
실제로는 XX국이라는 명칭을 썻으며 그 이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일본서기,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의 중국 역사서들에 각각 다르게 등장한다.
[edit]
3 역사와 특징 ¶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전에 처음 등장하며, 신라 등의 주변국에서는 이들 나라를 통틀어 가야(加耶) 혹은 가라(加羅)라고 불렀던 듯 하나, 가야는 본래 가락국(駕洛國)[8], 즉 금관국(金官國: 지금의 김해)의 이름임이 확인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 지역을 통틀어 미마나(任那, 임나)라 부르기도 했다.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임나란 말도 금기시 되는 것 같지만, 임나 자체는 단순한 지역명으로 추정된다. (관련되어, 임나가 대마도 등이었다는 설도 있다.)
가야의 유적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제철공정이 이루어졌던 유적이 있는데, 이것은 동북아에서 가장 오래된 모든 제철과정이 포함된 유적이다. 또한 화폐가 철로 사용되고 중국, 일본 등지에서마저 철을 사러 오는 등 현재의 듣보잡기믹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천년 전 가야의 세력권이었던 김해 평야는 당시 바다와 많은 섬으로 된 다도해였다고 한다. 산지에서 나는 철과 바다와 인접한 지역적 특성 탓에 가야인들은 손쉽게 철을 해외로 수출할 수 있었다.
풍습으로는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 왜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남녀가 문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삼국지). 편두항목 참조.
고분이 제법 많이 발견되는데, 모 고분에서 발견된 순장된 시녀로 추측되는 여자의 경우엔 152cm에 21인치 허리의 팔등신 미녀로 복원되었다. 가야 연맹이 몰락기에 접어들었을 때 여전사들이 전쟁에 나선 흔적이 있다. 흠좀무. 아아... 팔등신 미녀군단의 꿈이여...
[edit]
3.1 주거 ¶
드라마 김수로의 삐까뻔적한 궁궐과 백성들의 초가집은 가볍게 무시해주자. 김수로왕당시에는 수로왕도 초가로 집을 지었다. 사실 삼국시대 초기에는 기와라는 것은 새로운 물건이었다. 가야에서 기와집이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가야 말기부터다.
왕도 초가집에서 산 만큼 평민들의 주거 역시 그리 발달하지는 않았었는데, 땅을 파고 들어가 벽 없이 지붕만 덮고 사는 수혈가옥과 집이 기둥으로 들어올려진 고상가옥을 같이 만들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 <동이전(東夷傳)변진(弁辰)조>에 "여름에는 소거하고 겨울에는 혈처한다(夏則巢居冬則穴處)"라는 글이 있어 소거라는 말이 고상주거함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짐작되며, 실제로 가야지방에서는 고상식 창고 건물 모양의 집모양 토기(가형토기)가 발굴되었다.
[edit]
4 임나일본부설 ¶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이 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광복 이전에는 임나일본부의 입증을 위해서만 연구되었고 광복 이후 80년대까지는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는 안습의 시기를 거쳐왔다. 그 과정에서 학계를 지배했던 것은 초기의 김해의 금관국 중심의 연맹체가 금관국 멸망 이후 후기의 대가야 중심으로 이동하였다는 학설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자신감을 다소 회복한 학계에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 결과, 이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발굴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굵직굵직한 발굴 몇개가 마감될 때마다 학설이 생겼다가 뒤집어지는 양상도 보이고 있다.[9] 때문에 아래 각 지역에 대한 소개에도 이전의 학설과 현재 학설이 뒤엉겨 있는데, 어느쪽이 옳다고 확실하게 단언하기 곤란한 관계로 약간의 추가는 하지만 삭제는 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최근에는 금관국가 고구려의 침략으로 5세기 초에 멸망했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되는 유물까지 나왔다. 금관국 유적인데, 5세기 후반부의 것이라고.
다만 어느쪽이든 일본의 왜국이 가야를 지배했을 가능성은 낮다. 일반적으로는 백제가 가야를 오랫동안 자신들의 세력권에 넣었고, 같은 백제 세력권이었던 왜가 그 기록을 차용해서 관계를 뒤집어 일본서기를 꾸몄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일본서기에는 4세기 근초고왕의 시기에 백제의 장군으로 가야를 정벌한 목라근자라는 장군이 나온다. 이 때 가야가 백제의 세력권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왜국이 이것을 자신들의 기록으로 왜곡하여 진구 황후의 기록 등으로 바꿨을 수가 있다. 진구황후는 3세기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어 시기가 차이나는 것은 고질적인 이주갑인상 문제다.)
게다가 일본서기에서 보여지는 성왕의 가야에 대한 재건 의지를 보면 4세기 이후 가야는 친백제계 지역이었고, 고구려에게 박살난 가야를 수습하여 신라에 연합하여 대항하려던 정황이 엿보인다. 그러나 결국 성왕의 죽음으로 백제는 가야에 대한 주도권을 잃고, 신라가 가야를 흡수하게 된다.
왜국이 가야와 친밀했던 점은 사실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봐도 가야에서 건너간 유물이 많이 나오며, 인적 교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부라는 정체 불명의 기관은 같은 백제 세력권이었던 가야와 왜국이 연락하기 위한 외교창구 정도에 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는 긴메이 덴노기에서 성왕과 왜국의 관계를 거꾸로 기술하여 왜곡했다는 의심을 많이 받는데, 당시 정황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백제왕이 가야와 왜국 모두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타당하기에 왜가 가야를 지배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edit]
5 가야연맹 구성국 ¶
http://pds27.egloos.com/pds/201304/28/15/f0018015_517d141b50562.png?width=550
[PNG external image]
변진도 12개국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서 제각기 거수(渠帥)가 있다.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사람은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험측(險側)이 있고, 다음은 번예(樊濊)가 있고, 그 다음은 살해(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邑借)가 있다. ······················이니 '번', '진한'을 합쳐 이십사개국이다. 이 중에 큰 나라는 4~5천호나 되고, 작은 나라는 6~7백호가 되어 총 호수가 45만호가 된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
위의 기록에 따르면 변진지역에는 24개 국가가 있었던 듯 보이나, 개중에 '사로국'(신라)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때 진한의 국가들까지 한꺼번에 센 듯 하다. 일반적으로 앞에 변진이 붙은 12개 국이 초기의 가야로 추정된다.
jungigaya.png
•전기가야[10]
명칭 현재 지명 알려진 이름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東國) 경상남도 밀양시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경상남도 함안군 철원면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東國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소가야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변진락노국(弁辰樂奴國) ?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 경상남도 창원시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변진구야국(弁辰拘邪國) 경상남도 김해시 금관가야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안라가야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부산광역시 동래구
hugigaya.png
[11]
•후기가야[12]
명칭 현재 지명 알려진 이름
가라국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안라국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안라가야
가이기국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다라국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졸마국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고차국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자타국 경상남도 진주시
산반하국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걸손국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임례국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탁순국 경상남도 창원시
탁기탄국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 밀양?)
남가라국 경상남도 김해시 금관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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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금관국(구야국, 금관가야) ¶
항목 참고. 최근 안야국의 재발견으로 위상이 다소 축소되는 감이 있으나, 가야 후기에 반파국이 주도권을 잡은 뒤에도 이진아시 신화나 '가라'(반파국) - '남가라'(금관국) 등의 이름으로 보아 금관국과의 연결고리는 꾸준히 강조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한동안 가야 국가들 중에서는 무언가 주변에 어필하는 힘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대개 2 ~ 4세기 낙동강 하구의 철 매매를 통한 부 축적으로 얻은 권위로 추정한다.
2 ~ 3세기에는 구야국으로, 4 ~ 5세기에는 가라, 임나, 수내라, 소내라 등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사기에서 금관국이라고 하였다. 금관국은 4세기 이후 멸망 이전의 이름으로 보이며, 반파국에게 '가라'의 이름을 뺏긴 이후에는 '남가라'라고 칭해진 것으로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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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반파국 ¶
항목 참고. 흔히 대가야로 알려진 국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변진반로국'으로 나타나며, 5세기 이후 '가라'의 이름을 금관국에서 탈취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이 때문에 금관국은 일본서기 등에서 '남가라'로 나타난다).
5세기 들어 성장하기 시작하여 5세기 후반 백제가 쇠진한 틈을 타 섬진강 일대로 진출하고 가야 일대의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보이나, 다시 백제가 국세를 회복하여 섬진강 일대로 압박을 가해오고 6세기 후반 백제와 신라의 힘싸움 사이에 끼여 있다가 결국 신라에게 562년 멸망한다. 이 나라가 신라에 정복되는 서기 562년을 일반적으로 가야가 완전히 소멸한 해로 파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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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고령가야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혹은 진주시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 연맹의 하나 사실 고령이라는 이름은 가야인들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신라 병합 이후에 사용한 것. 유물이나 유적이 거의 없어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에 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기록을 바탕으로 위치만 추정될 뿐이다.
사실 고령가야는 실제 가야 소국과는 무관할 뿐더러 고령가야가 있었다는 옛 함창군 지역도 원래의 신라 영역이었던 진한의 사벌국 지역에 속한다. 신라 말기에 신라의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고령지역의 호족세력이 그 명분으로 가야를 참칭되기도 하고 940년 고려 태조23년에 5가야의 명칭을 변경하면서 '고령가야'라는 이름이 부여되어 옛 가야소국 중에 하나인 양 와전된 가능성이 아주 높다. 단 함창 일대의 호족세력들이 가야인의 후예이거나 삼국통일 이후 가야인들이 이주해 와 거주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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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다라국(多羅國)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에 있던 나라. 3~4세기까지 독자적인 발전을 하다가 5세기부터 대가야에 복속된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는 대규모의 철유적 또한 존재하고 있어 대가야의 경제, 군사적 기반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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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초팔국(草八國) ¶
지금의 합천군 초계면에 있던 나라. 역시 다라국과 비슷한 시기에 대가야의 영향권으로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본기에는 파사이사금때에 다벌국, 비지국과 함께 정복되었다고 쓰고 있으나, 이후에 나오는 가야의 신라 공격 기사때 다시 잃은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에서 보기힘든 분지지형으로 가히 미나스 티리스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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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비자벌(比自火) ¶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불사국(不斯國)이며, 《삼국사기》에는 비사벌(比斯伐), 《삼국유사》에는 비화(非火), 《일본서기》신공기에는 "比自鉢(hisiho)"이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이며, 나라 자체는 듣보잡이긴 한데, 신라 진흥왕이 정복한 뒤 창녕비를 세워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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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성산가야(星山加耶) ¶
지금의 경북 성주에 위치하였던 국가. 《삼국사기》에 "본피(本彼)"라 나오나, 여기에는 의문스러운 점이 있으며, 《양직공도》에는 "반파(叛波)", 《일본서기》에는 "伴跛(hahe)"로 나타난다. 6세기경에는 친 신라 반 백제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보이며, 결국은 신라에 정복되어 본피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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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안라국(安羅國)[13] ¶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이며, 《호태왕비문》과 《일본서기》에는 안라(安羅)로서 등장한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선 《가락국기》를 인용해서 아시량국(阿尸良國)이라 기록했다.
위치는 현재의 함안을 중심으로 하는 함양지역이다. 고령가야와 금관국가 멸망한 뒤 한동안 가야연맹의 주축을 이루어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주도하였으나, 결국은 신라에 정복당하여 아시촌소경이 된다.
초기의 금관국 중심, 후기의 반로국중심이라는 가야 연맹 주도세력에 대한 초기 이론이 붕괴되는데 중심에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반로국 멸망 이후 가야 연맹 주도라는 2단계가 3단계로 변하는 문제 정도가 아니다. 특히 광개토대왕비에 등장하는 안라인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는 기록에 등장하는 '안라安羅'에 대해서 기존에는 신라로 보는 학설이 많았으나, 함안의 안라국으로 보는 입장도 증가하고 있다. 광개토대왕 시기는 당연히 금관국 멸망 보다도 훨씬 전이기 때문에 주도세력에 대한 혼란이 증가되고 있는 상황.
금관국 몰락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포상팔국의 난 때도 초기엔 안라국이 이들 배후에서 금관국을 공격했다는 설이 다수였으나, 2000년대에는 역으로 금관국과 함께 가야 초기를 주도하던 안라국 또한 포상팔국의 공격대상이었다는 설이 나오고 있다. 금관국은 이후 주도권을 상실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녔지만, 유물로 볼때 안포국은 오히려 세력을 확대한 모양. 이후 광개토대왕의 공격때도 무사히 넘어갔고, 나중 반로국에 대항하는 가야 남부 일대 국가들의 주축이 되기도 했다. 《일본서기》의 기록이라 완전히 신뢰할수는 없지만 안라회의도 안라국이 주도하에 개최한 국제회의할 만큼 후기 가야 연맹에서 강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특이하게 명칭 논란이 많은 곳으로, 아라가야, 안야국, 안사국, 안라국 등이 대립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아나가야', 삼국유사 오가야조에는 아라가야, 일본서기에는 안라와 아라가 같이 사용되고 있다.
이곳 블로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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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탁순국(卓淳國) ¶
백제국사 전의 '탁국(卓國)'과 의 '탁순국(卓淳國)'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녹순(㖨淳)이라고도 하는데, 녹과 탁이 통하는 것을 놓고 신공황후 신라정벌 기사의 녹국과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 탁순 = 녹순 - 녹국 - 탁기탄 = 녹기탄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1970년대까지는 '달구벌'의 음차라는 설이 주류를 차지하여 대구설이 득세하였으나, 최근에는 창원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고, 일각에서는 의령설을 제시하기도 한다.
시조와 왕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리사등이 마지막 왕으로 추정되는데, 숭신천황기의 '도노아아리사등'과의 관계 문제 등으로 인해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 관직명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다. 4세기의 말금한기(末錦旱岐)를 군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가야의 군주명으로 '한기'가 쓰인 데서 유래한 것이다. 한편 '말금'을 '마립간' = '매금'과 통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가야의 군주를 일컫던 '한기'를 포함해 일반 군주 칭호만 두 개 이어지는 괴이한 칭호가 된다.
일본서기 신공기 46년(366)기사에선 백제가 왜와 교류하기 위해 탁순국이 도와줬으면 한다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고, 탁순국의 말금한기는 백제 사신에게 왜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백제 사신의 말을 왜 사신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탁순사람 과고를 보내어 왜국 사신의 시종을 백제에게 안내하기도 했다는 기사도 있고 심지어 신공기 49년(369)년 기사에서 탁순국이 왜군의 집결지 역할을 했다는 기사도 존재한다.
이런 것들로 보아 일본과 백제에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지만, 백제와 신라가 강성해지자 백제와는 여러가지로 안좋은 관계가 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안라회의가 일어나게된 사건을 보게 되면 아리사등이 신라의 스파이들을 모두 내치는 것에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는 후기 가야연맹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창원 반계동 고분군이 탁순국과 관련 되어 있는데 23호분에서는 고령 양식의 유개대부 장경호, 단추형 꼭지 뚜껑 단각고배 등이 출토되어 대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수 있고 25호분에서 쇠망치, 쇠집계등의 철기들이 출토되어 금관국과 더불어 철기 생산의 요충지 였음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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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항목 ¶
•가야/왕사
•기생반숙녜
•안라회의
•사비회의
•국립김해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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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도질토기가 일본에 전파돼서 스에키 토기가 되기 때문에 당연하다. 조금 재밌는 사실은 와질토기와 고식 도질토기까지는 가야와 신라의 토기가 거의 차이가 없고, 신식 도질토기에 와서야 둘이 확실히 나눠진다. 그래서 혹자는 사실 신라도 원래는 여러 가야 중 하나가 아니었냐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추가로 와질토기와 도질토기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많은데, 아직 대체할 용어가 딱히 없어서 이 용어가 고고학계에서 계속 쓰인다.
•[2] 임나일본부설때문에 부정적인 단어로 인식되는데 "임나"는 가야지역 일대를 지칭하는 단어로 추정된다. 일본이 문제야
•[3] ex 금관가야는 김해일대, 대가야는 고령일대 등
•[4] 가야 소국의 왕들을 칭하는 말이다. 《일본서기》에만 등장하는 기록.
•[5] 반로국 도설지왕대 멸망한 직후, 대부분의 가야 소국들도 같이 신라,혹은 백제로 흡수된것으로 보인다.
•[6]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최대 영역은 전라도 일부(대략 소백산맥까지)까지로 추정된다. 7차 교육과정의 일부 고교 국사교과서에도 반영되어 낙동강 서부의 경상도 수준으로 나타난 지도보다 많이 확장되었다. 전북 남원에서도 가야의 유적이 나왔다.. 이는 후대의 대가야가 백제가 혼란한 틈을타 차지한 것
•[7] 이병도 교수가 처음 주장했다.
•[8] 참고로 일본어에는 조선이나 한국등의 한반도 국가를 의미하는 한자인 韓을 から로 부르는 독법이 있다. 한자의 뜻을 떠나 발음으로만 따진다면, 이를 통해 고대 일본인들이 가야와 韓을 동일시 했거나 적어도 연관이 깊은 것으로 간주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9] 대표적으로 대성동 13호 고분에서 일본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만 발굴되는 일본계 유물인 파형동기(참고로 경남 FC의 엠블럼으로 쓰이고 있다.)가 발굴된 일이다. 심지어는 일본의 파형동기들보다도 훨씬 크다(…) 그래서인지 2011년 현재까지 고대 일본과 가야의 관계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일고 있다.
•[10] 김해 금관국 중심이었던 4세기 이전의 가야들.
•[11] 해당 지도의 참고자료 - , 김태식 저서, 푸른역사, 2002. 위의 자료도 똑같다.
•[12] 반파국 중심이었던 5세기의 가야연맹
•[13] 흔히 아라가야(阿那加耶)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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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령.팔량치를 넘어서 -무릉리,말흘리,상백리,백천리고.. §유물 - 가야
2005/06/18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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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대가야-(30)육십령.팔량치를 넘어서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산은 없고, 흰 눈만 펼쳐졌다. 눈이 부셨다. 그러나 바람은 세찼다. 찬바람에 발목까지 푹푹 잠겼지만, 1천500여년 역사의 자취를 밟는다는 게 여간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5분쯤 고개를 오르자 서쪽 너머로 전북 장수의 산과 들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백두대간 남덕유산(1천507m)과 백운산(1천279m) 사이에 자리한 육십령(六十嶺;734m).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장계면의 경계에서 영.호남을 잇는 고개다.
삼국시대 이후 들끓는 도적 떼를 피하기 위해서는 산아래 주막에서 족히 60명은 모여야, 그것도 죽창과 몽둥이를 들고서야 넘을 수 있었다는 곳이다.
대구에서 88고속도로를 달리다 함양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서상나들목을 빠져 나왔고, 다시 26번 국도를 타고 승용차로 10여분쯤 달려 도착한 육십령이었다.
문명의 이기에 편승해 손쉽게 도달한 고개였지만, 그 때 대가야인들은 산 넘고 물 건너 피땀 흘려가며 당도했을 터. 땅을 가꾸고 또 새 땅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렇게….
육십령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남쪽으로 내달리자 함양읍과 전북 남원을 경계로 한 팔량치(八良峙;513m)에 닿았다. 소백산맥 연비산(843m)과 삼봉산(1천187m) 사이에 우뚝 선 고개. 남강의 지류인 위천(謂川)에 합류하는 팔량천이 동류하고, 역시 남강의 지류인 임천강(臨川江)이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멀리 남원의 '아영들'과 '운봉고원'이 내려다보였다 육십령과 팔량치는 대가야가 백두대간을 넘어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만 했던 두 고개였다.
가야산을 모태로, 가천과 야천을 젖줄로, 야로 철을 무기로 했던 대가야. 300년대 전반, 변한의 소국인 '반로국'(半路國)에서 '가라국(加羅國)'으로 거듭난 대가야는 궁성을 짓고, 산성을 쌓으며 도읍지 고령의 방어망을 구축했다.
'피의 역사'를 준비하며 가야 제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전(前) 단계였다. 사방으로 방어망을 확고히 구축한 대가야는 400년대로 접어든 뒤 북쪽 성주 세력과 동쪽 신라를 견제하면서 서서히 서, 남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황강 중류의 길목인 경남 합천군 봉산면 송림리 반계제 일대를 손아귀에 넣고, 강줄기를 따라 황강 상류의 거창과 남강 상류의 함양을 향해 거침없이 달렸다.
백두대간 소백산맥을 넘는 서쪽으로의 진출로는 거창과 함양뿐이었다. 거창읍에서 국도를 따라 남동쪽으로 약 4km 지점에 위치한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 고분군'. 돌널무덤(石槨墓)이 있는 남하초교 뒷산 구릉에서는 황강이 한 눈에 들어왔다.
창원대박물관 정밀지표조사에서 소가야(경남 고성) 양식 일부 토기와 대가야 양식 굽다리 접시(高杯), 그릇받침(器臺), 목 긴 항아리(長頃壺) 등이 나온 무덤이다.
초창기 소가야와 교류를 벌이다 400년대 중반 이후 대가야에 편입된 지역이다. 무릉리 고분군에서 황강을 따라 서쪽 상류로 향하다 보면 경남 함양과 전북 무주 방향의 교통로가 교차하는 거창군 마리면 말흘리 '진산마을' 뒷산에도 대가야 세력이 거쳐간 흔적이 나온다.
거창읍을 관통해 황강 상류에 합류하는 위천의 상류에 자리한 '말흘리 고분군'이다. 1985년 진주박물관이 발굴한 무덤 3기 중 2호 무덤에서 뚜껑있는 목긴 항아리, 원통모양 그릇받침, 덮개(蓋) 등 대가야 토기가 1점씩 출토됐다.
그러나 1호 무덤에서는 소가야의 영향을 받아 현지에서 만든 사발모양 그릇받침(鉢形器臺)과 삼각형 창(窓)이 난 굽다리 접시, 아가리 넓은 항아리(廣口壺) 등이 나왔다.
무릉리 고분세력과 마찬가지로 당초 소가야의 영향을 받던 세력이 이후 대가야 세력권에 들어온 것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을 넘어 전북 남원 장수로, 남강을 따라 경남 산청 진주로 통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 함양.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거창을 비껴 남류하는 남계천(濫溪川)과 백운산에서 발원해 남동류하는 위천은 바로 이 곳에서 서로 만난다.
남계천 상류에 인접한 함양군 수동면 '상백리 고분군'에는 중형 무덤 10여기가 있다. 지난 72년 동아대박물관 수습조사에서 대가야 양식 그릇받침, 뚜껑 있는 목 긴 항아리와 목 짧은 항아리, 굽다리 접시 등이 나왔다.
말안장, 말띠 드리개, 말 재갈, 화살통, 고리자루 큰 칼 등 지산동 고분군에서 나온 것과 같은 양식의 마구(馬具)와 무구(武具)도 출토됐다.
이 고분군에서 남계천을 타고 10km 가량 내려가면 대가야 토기만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함양읍 '백천리 고분군'이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이 고분군은 88고속도로 함양나들목에서 동쪽으로 1km쯤 떨어진 백천리 '척지마을' 뒤편에 20여기의 중.대형 무덤으로 이뤄져 있다. 이 무덤의 내부구조와 출토 유물은 대가야 양식 일색이다.
거창을 편입한 대가야가 400년대 후반 또는 500년대 초에 세력을 확장했던 곳이었다. 거창과 함양을 통해 서쪽 루트를 뚫은 대가야는 동시에 남쪽 루트인 산청에도 눈을 돌렸다.
지리산을 돌아 내려온 경호강이 함양을 거쳐 내려온 남강과 합류하는 유역인 산청은 대가야가 낙동강을 거치지 않고 해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합천-거창-함양-진주-하동의 교통로를 잇는 길목이었다.
경호강이 바로 곁에서 비껴 흘러가고 있는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생초 고분군'. 함양 백천리 고분군에서 남강 하류로 약 10km 내려온 곳이다.
어서리 마을을 배경으로 조롱박 2개를 엎어놓은 듯한 산 구릉 위에 펼쳐진 이 고분군에서는 79기의 가야 무덤이 확인됐다. 대가야 토기와 철기, 장신구 등이 수백 점 쏟아진 이 무덤의 구조와 유물양식으로 봐 400년대 후반이나 500년대 초반 대가야가 완전 복속한 지역으로 추정됐다.
또 가야고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동 거울(銅鏡)과 스에키(須惠器;왜 토기) 11점, 백제계 토기가 함께 나와 대가야를 둘러싼 주변 세력과의 관계를 캐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전망이다.
2002년 경상대박물관이 이 일대 조각공원 조성을 앞두고 발굴조사를 벌였으며, 산청군은 향후 주민들이 조각공원을 거닐며 무덤 속까지 살펴 볼 수 있도록 봉분을 쌓지 않은 상태로 내부를 공개할 방침이다.
생초고분군에서 경호강을 따라 다시 남쪽으로 10여km 떨어진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 고분군'. 중촌리 '하촌마을' 뒤편 월명사로 오르는 능선 왼편에 분포하고 있는 이 무덤은 나무널(木槨)에서부터 가로로 구멍을 낸 돌방무덤(橫穴式 石室墓) 단계까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금동으로 장식한 마구, 봉황이 새겨진 고리자루 큰 칼 등 대가야 양식 무덤구조와 유물을 갖춰 생초리와 함께 400년대 후반 이후 대가야가 병합한 지역이다. 대가야는 이렇게 거창.함양을 거쳐 백두대간을 넘봤고, 다시 산청을 거쳐 남으로 진주, 하동을 향해 말고삐를 죄었다.
대가야, 5~6C 남원.장수.진안까지 영향력 미쳐
경북 고령을 중심으로 한 가야의 정치체제는 가야 후기를 대표한 가라국(加羅國) 혹은 대가야(大加耶)였다. 당시 세력권은 경남 함안과 고성 일대를 제외한 서부경남 대다수를 아우른 광범위한 지역이었고, 그 영향력은 호남 동부의 남원 장수 진안까지 미쳤던 것으로 파악된다.
경남 서남부 지역의 경우 합천을 비롯해 거창.함양.산청.의령.진주 지역에 대가야 문물이 집중 출토되고 있다. 지배층의 무덤 구조나 그곳에서 나오는 유물로 봐 대가야 문물의 확산유형은 몇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무덤 내부구조와 출토 유물이 모두 대가야 양식인 유형(A형), 유물(주로 토기)만 대가야 양식인 유형(B형), 토기가 대가야 양식에 토착계 백제계 신라계 등이 섞여 나오는 형태(C형) 등이다.
이렇게 볼 때 산청 중촌리와 생초리, 거창 무릉리, 함양 백천리 고분군은 A형에 속한다. 대가야의 지방세력이거나 대가야에 의해 완전 병합된 정치체가 존재했던 지역이다.
이 중 산청 중촌리는 대가야가 이미 강력한 정치체를 형성한 토착집단을 무력으로 병합했고, 함양 백천리의 경우 처음부터 대가야 문물을 소유한 자들이 지배집단을 형성한 지역으로 추정된다.
또 거창 말흘리 고분군에서는 대가야 토기에 토착계 토기가( C1형), 진주 옥봉.수정봉 고분군에서는 백제계 토기가(C2형), 의령 유곡리와 경산리 고분에서는 신라후기 양식 토기가 함께 나왔다(C3형).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을 근거로 볼 때 대가야는 5세기 4/4분기~6세기 1/4분기 가야 후기의 주도권을 행사한 정치체로 규정할 수 있다.
당시 고령을 중심으로 합천의 서부와 거창 함양.산청 일대를 영역화한 뒤 함양을 넘어 운봉고원 일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일부는 거창을 넘어 전북 장수까지 세력을 떨쳤던 정치체였다.
그러다가 6세기 중엽이 되면 가야지역으로 팽창해 오는 백제와 신라에 대응해 때로는 친백제, 때로는 친신라 정책을 취하면서 생존을 위해 노력하게 되고, 그 결과 진주와 의령 지역에 신라 또는 백제계 양식 토기가 섞인 고분군을 남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
〈조영제 경상대 교수〉
[출처] 육십령.팔량치를 넘어서 -무릉리,말흘리,상백리,백천리고..|작성자 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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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상백리고분군에 대하여 알아보자 게시판
2012/10/15 13:56
복사 http://blog.naver.com/gastawyf/7014913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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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상백리의 남계천이 형성한
하안단구에 입지한고분군
봉토의 규모나 고분군의 전범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바 없지만
1972년도에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긴급 구제발굴 결과에 따르면 고분군의
범위는 이웃 구름과 경지 일부에 걸쳐 넓게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상백리 고분군은 함양읍에 소재하는 백천리고분군 으로부터는
동쪽으로약 20km 떨어져 있다
유구는 장축을 남북 또는 동서로 하는 무질서한 형태였고 할석으로 사방을 겹으로 쌓아올린 구덩식돌덧널매장시설로 하는 고분으로
경작으로 봉분은 이미 많이 훼손되고 지하유구만 조사되었다
모두 8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매장시설은 냇돌로 축조한 돌덧널이고 길이 3~4m, 너비 1m 내외, 깊이 1.2m 정도 되는 중소형에 속한다. 토기를 비롯한 많은 부장유물이 수습되었는데 그 중에는 발걸이를 비롯한 마구류와 비늘갑옷 및 판갑옷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삼각판을 못으로 고정시켜 만든 이 판갑옷은 그동안 한반도지역에서는 정식으로 발굴조사된 예가 없었고 일본지역에서는 이미 출토 예가 있었기 때문에 한·일 양 지역의 갑옷생산과 분배에 있어서 문제가 제기된 바 있는 유물이다.
함양상백리고분군에대하여알아보자
[출처] 함양상백리고분군에 대하여 알아보자|작성자 gastawy
[답변]함양군의...잃어버린...500년간의...역사을찾자...이길이..함양군을..사랑하는길이다...
- 작성일
- 2014-02-25 20:25:41
- 작성자
- 문화관광과
우리 함양군의 고대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께서 문의하신 내용은 게시번호 374, 375번과 동일한 사항임을 알려드립니다.
- 담당
- 행정과 행정담당(비서실) (☎ 055-960-5001)
- 최종수정일
- 2024.07.03 13:1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