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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사(咸陽郡史) 일고유감(一顧有感)
- 작성일
- 2013-04-10 21:33:55
- 작성자
- 박선호
함양군사(咸陽郡史) 일고유감(一顧有感)
잃어버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오래도록 황석산성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거창군사(居昌郡史)를 오래 동안 참고를 한 사람으로서 함양군사는 왜 없는가? 라는 반문과 함께 누구보다도 더 함양군사의 탄생을 기뻐하였다. 한권의 책을 만든다는 고통은 충분히 이미 알고 있기에 지역사회를 위한 지극한 사랑과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정과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수년간에 걸쳐서 자료를 조사하고 한 사건 한 사건을 밤잠을 설치면서 흩어진 사건들을 시대별로 모아서 역어나가는 그 노고는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함양의 후손들을 위하여 지금까지는 없었던 함양군사(咸陽郡史)를 만들어 낸 그 열정과 노고에 충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오래도록 염원하였던 함양군사의 탄생을 기다려온 사람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일고(一顧)한 소감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오래된 역사를 다시 만드는 것과도 같은 새로운 역사를 엮어 간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자료가 불충분하고 산재한 자료들이 왜곡되어 정사(正邪)를 구분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에 대하여 공감을 한다. 그러나 있는 자료는 왜곡하고 없는 자료를 일부로 만들어서 역사를 왜곡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공감을 할 수가 없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1. 황석산성 전투에 참여한 거창현, 안음현, 함양현의 입성인원을 35,00명이라고 근거도 없는 말을 만드는 행위,
2.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한 왜군의 규모를 일본인들이 말하는 대로 27,000명이라고 단정하는 행위
3. 황석산성의 함락 원인이 모두 백사림이 문을 열어주어 왜군이 들어 왔다고 하며 모든 책임을 백사림의 잘못으로 돌리는 행위
4. 역사적 사실의 근거를 일본인들이 조작한 선조의 수정실록을 근거로 하는 행위.
5. 황석산성 전투부대장들에게 보낸 풍신수길의 감사장에 남원성을 공격한 좌군대장 우기다 히데이에이를 등장시키는 행위, 등에 대하여
함양군민에게 2012년에 발간한 함양군사(咸陽郡史)의 기록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구분하여 설명을 드리고자 한다.
첫째로
황석산성 입성인원의 규모에 대한 설명
가. 당시에 같은 시기에 전개되었던 남원성 전투가 전개된 『만인의총』이라고 하는 남원성은 성의 둘레가 2,5km이고 황석산성의 둘레는 2,9km로 황석산성이 더 크다. 따라서 수용할 수 있는 면적이 황석산성이 더 크다.
나. 거창좌수 유명개는 사설교육기관인 공회소를 1577년도부터 안음현에 7개소를 거창현에 9개소를 만들어서 직접적으로 마을마다 순회를 하면서 백성들의 도리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고 1592년 임전쟁의 발발하자 왜군들의 상황을 수시로 보고를 하고 격문을 발하였으며 젊은 청장년들을 위천으로 불러서 군사훈련을 지속적으로 실시를 하였다.
따라서 유명개는 수시로 바뀌는 현감들보다 더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유명개의 년보(年譜)에 의하면 『성안이 자원하여 온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남원성에선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내용이다.
당시에 1594년 거창현감 박정완이나 1595년 권황 같은 현감들의 학정을 피하여 거창백성들이 집을 불사르고 산속으로 도망을 갔던 백성들도 군무장 유명개의 말은 믿고 의지하여 황석산성으로 입성을 하고 있다.
다. 유명개 년보에 의하면 거창 함양 안음현등의 각 현에서 천여명이 넘는 인원을 각 현감 등이 직접 인솔하여 입성을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현에서도 추가 또는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입성하여 식량의 추가수요를 일으켜 유명개의 아들들이 식량을 더 가져오고 있다.
라. 거창좌수 유명개나 안음현감 곽준이나 함양현감 조종도가 모두가 남명조식의 교육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사람들로 수기치인 실천궁행(修己治人 實踐躬行)의 실천유학(實踐儒學)을 몸소 행동했던 사람들로 등을 구분하지 않는 『만인이 평등한 대동사회(大同社會)의 이상을 꿈꾸는 철학을 가진 사람 』들이었고 그러한 유명개의 교육을 받았고 조종도의 영향을 받은 백성들이었다.
당시 관장들의 탐학과 명나라군의 착취와 왜놈들의 야만적인 약탈로 미루어 보면 정유재침략전쟁 중 가장피해가 극심했던 거창현과 안음현, 함양현은 거의 모든 백성들이 자진하여 입성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35,00명이 아니라 7,000여 명을 훨씬 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로
왜군의 참전규모 27,000명은 일본인들의 조작이다.
우선적으로 정유재침략을 위한 전투편성에서 일본전사나 양재숙의 『임진대전쟁』과 조중화의 『바로잡은 임진왜란사』에서 14만1천5백 여 명중 남원성을 공격한 좌군은 우기다히데이에를 대장으로 45,800명이고 황석산성을 공격한 우군은 모리데루모도를 대장으로 75,300명으로 되어있다.
함양군사에서는 일본인들이 조작한 『임진전란사』를 충실하게 준수하여 27,000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그것은 전주성에서 북진한 병력, 가도오기요마사 1만명과 나베시마나오시게 12,000명, 그리고 구로다나가마사군 5,000명으로 27,000명이다.
우선 언뜻 보아도 어떻게 전주성에서 북진한 왜놈과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한 왜놈의 숫자가 똑 같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전주성의 북진병력을 황석산성으로 그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궤멸된 황석산성전투의 참패를 숨기기 위하여 90%에 가까운 전사자와 부상자를 가진 모리데루모도와 조오소가베모도지가부대를 삭제를 하였고 구로다나가마사부대는 1만 명 중에서 7,000여명이 황석산성에서 사라졌다.
전주성에서 90% 이상이 궤멸된 모리데루모도 부대원 중 모리히데모도를 비롯한 길견광행, 돌호원속 등 2,000여명을 지원을 받아서 5천명을 만들어서 북진을 한 병력을 황석산성 전투에 그대로 기록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구로다나가마사부대원이 1만명이라는 사실은 전투편성이나 심지어 남원성도에서 마저 1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5천명이라고 함양군사에 기록을 하는 문화원의 저의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당시에 서문을 공격하여 함양현 사람들과 싸웠던 나베시마나오시게는 그의 고향 사료집에서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 등으로 미루어 보면 27,000명이라는 숫자는 황석산성 전투를 은폐하려는 조선총독부의 조작임에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위에서 제시한 여러 증거들이 증명을 하고 있다.
셋째로
황석산성의 함락 원인이 모두 백사림이 문을 열어주어 왜군이 들어 왔다고 하며 모든 책임을 백사림의 잘못으로 돌리는 행위는 못난 조선 사람들 끼리 다투다가 성이 함락되었다고 조선 사람들의 열등의식을 조장하는 행위다.
가. 성주 백사림에게 산성이 무너진 책임을 지우는 행위가 전투기간이 1597년 8월16일 하룻밤 동안을 기준으로하기 때문인데 군무장 유명개 년보에 의하면 백사림은 18일 유명개가 순찰을 하는 새벽까지 북문의 전투현장에 있었다.
나. 전투물자가 떨어지자 백사림이 먼저 탈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먼저 탈출을 하고 있다. 지족당 문집의 황석산성실적(黃石山城實跡)에 「군민이 놀라고 당황하여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알고 각자가 살길을 찾는데 초저녁이 되자 성을 넘어 탈출하는 자가 발생하였다.(군민경황 각계도생자 초혼유성도주자 불가승계 (軍民驚遑 各計圖生者 初昏踰城逃走者 不可勝計))」 라고 기록되어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백사림이 탈출을 하기 전에 백성들이 먼저 탈출을 하고 있는 것이 증명이 된다.
「읍혈이유지 효시이경지 성위병행이 종불가금알(泣血以諭之 梟示以警之 誠威竝行而 終不可禁遏)」이라는 지족당 문집의 기록처럼 곽준 안음현감과 군무장 유명개와 함양현감 조종도와 교위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나가지 말라고 호소도 해보고 목을 베겠다고 위협도 해보았지만 끝내는 탈출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백성들이 먼저 탈출을 하고 있다.
따라서 황석산성이 무너진 모든 것이 백사림 성주 한 사람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조선인은 못난 사람들이라서 별 수 없다는 열등감을 조장하려는 일본인들의 의도적인 전술이다.
다. 당시에 백사림의 심판을 담당했던 예조판서 심희수는 백사림이 탈출을 하는 그 시간에는 이미 왜놈들이 들어와서 혼자서 지킨다고 버텨보았자 지킬 수가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조정의 신하들이 조사했던 상황도 일리가 있다고 할 것이다.
라. 황석산성의 무너진 원인은 첫째로 체찰사 이원익이나 도원수 권율 등이 왜놈들의 숫자를 정확하게 예측을 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고 두 번째로는 충분한 전투물자를 준비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고 세 번째로는 황석산성에서 싸운 전투요원들이 일시적으로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에도 절대적으로 복종을 하고 터질 것 같은 심리적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훈련된 군인들이 아니라는 데에 원인이 있다.
만약에 곽준이나 유명개나 조종도가 나가지 말라고 말렸을 때 백성들이 싸울 수 있는 무기는 비록 없더라도 남아있는 돌이라도 던지고 함성이라도 지르면서 성문을 굳게 잠그고 기다렸다면 참지 못한 왜놈들은 스스로 무너져서 물러 갈수도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수시로 변하는 전장의 상황은 누구도 예측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넷째로
역사적 사실의 근거를 일본인들이 조작한 선조의 수정실록을 근거로 하는 행위는 크게 잘못 되었다. 선조의 수정실록은 모두가 일본이 수정한 것으로 일본인들의 의도가 가미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임금인 자신도 자신의 실록을 마음대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유명한 왕들도 자신에 대해서 사관이 어떻게 썼는지 궁금하였지만 『임금님이 보시면 다음 왕들도 보자고 할 것이니 그러면 사관이 기록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라고 신하들이 보지를 못하게 하자 그대로 따랐다. 따라서 선조의 수정실록이 일본제국주의 시대 이전에도 있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수정실록이 역사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아닌지는 개념이 확실하게 서게 될 것이다.
일본 총독부가 한국의 역사자료들을 조작하기 위하여 「공명정대한 역사를 만든다.」라고 하면서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책들을 총독부로 제출케 하여 1910년 11월부터 1911년 말까지 5차례의 대대적인 작업을 실시했고 1937년까지 지속적으로 수정작업을 하였고 수정하지 못하는 것은 불태워 그 숫자가 20여 만 권에 이른다고 한다. 따라서 문위의 『모계문집』이나 정경운의 『고대일기』 등도 그때에 수정이 되어졌을 것이다.
다섯째로
황석산성 전투부대장들에게 보낸 풍신수길의 감사장에 남원성을 공격한 좌군대장 우기다 히데이에이를 그대로 등장시키는 행위, 등에 대하여
참으로 고약한 일이다.
함양군사의 작업을 오늘날에 와서 다시 시작하는 일은 일본인들이 말하는 옛날 역사책을 그대로 베껴서 전달하기 위한 작업은 아닐 것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없는 예산을 염출하여 새롭게 역사작업을 하는 것은 잘못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자라나는 후손들에게는 올바른 역사를 전달하고 가르치기 위한 중차대한 목적을 가진 작업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양군사에는 일본인들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서 일본인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전파를 하고 있다.
함양군사에 의하면 황석산성에 오지도 않은 「우기다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황석산성에서 전투를 하고 있고 황석산성에서 궤멸된 우군대장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는 없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행위를 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함양군사는 일본인들의 의도를 그대로 충실하게 전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판단된다. 역사를 잘 알지도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혼돈을 조장하려는 일본의 숨은 의도를 생각지도 않은 채 일본인들의 의도적인 거짓말을 신처럼 신봉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황석산성 참전병력의 규모는 75,300명이 아닌 27,000명이고 절대로 고칠 수가 없다고 선언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 중에 일본인들이 말하는 것에 더하여 배달민족의 잘못된 점이나 부끄러운 점만을 강조하여 민족적인 열등의식과 패배주의를 심으려고 노력하는 식민사학지들도 있고 민족적인 주체의식이 확고한 민족사학자도 존재한다.
한번 둘러본 함양군사는 함양군민들에게 나아가서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패배주의와 열등의식을 전파하려는 식민사관의 입장에서 일본인들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황석산성 입성인원을 3,500명이라고 출처나 근거도 없이 기록하고 있다. 역사서를 기술하는 것은 개인적인 소신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함양군사가 거창군사와 다른 점은 거창군사는 새로운 내용이나 새로운 년대를 포함하는 곳에는 반드시 관련근거를 밝혀 객관성을 유지하려도 노력을 하였으나 함양군사에는 근거를 확실하게 밝히지 않아 개인적인 소견인지 아닌지 불명확한 부분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민족사관이란?
배달민족이 역사의 주체임을 밝히는 것이고 대한민국의 지정학적인 위치가 주변국의 변두리가 아니라 중심임을 밝히는 일이며, 배달민족의 장점과 우월감을 키워서 배달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하여 당당한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하는 것이며, 대한민국 국민에게 분명한 목표의식을 심어주고 열정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민족사관이다.
마찬지로 내가 태어난 고향 땅이 자랑스러워야 하고 고향이 중심이 되고 무엇인가는 향토애를 가지고 열정적으로 노력하도록 만드는 것이 지방자치단체에서 할 수 있는 민족사관을 정립하는 일이다.
임진전쟁 시에 의병도대장 김면이나 정인홍이나 화왕산성의 곽재우나 황석산성의 조종도나 유명개나 곽준이나 황석산성에서 산화하신 7천 여 명의 잃어버린 영혼들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한사람의 영혼이라고 더 찾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로부터 교훈을 찾아 다시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한 것이 역사를 바로세우는 작업이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들마저 폄하하고 일본인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는 행위는 당연히 식민사관이다. 대한민국의 함양문화원에 이렇게 얼빠진 식민사관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대하여 깊은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식민사학자의 대표인 이병도도 죽을 때는 눈물을 흘리며 반성을 하고 죽었다는데 아직도 함양의 문화원이 식민사관을 생산하는 산실이 되는 우(愚)를 범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식민사학자는 책을 만들어서는 안 되고 번역을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은 청소년들과 국민들에게 목표의식을 사라지게 하고 열정을 빼앗아 가며 생활에 대한 염증과 우울증을 만들고 무기력하고 무능한 사람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롭게 시작한 함양군사는 일본인들의 조작된 이야기와 일본인의 의도를 그대로 전달함으로서 많은 예산과 수년간에 걸친 작업의 의미와 가치를 감소시켰고 세월과 함께 더 많은 국민과 청소년들의 역사의식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식민사관으로 오염을 시킬 것이며 함양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게 될 것이다.
일제로부터 독립을 한지도 벌써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일본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는 원인은 곳곳에 뿌리내린 이와 같은 식민사관에 빠진 사람들 때문이다.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조선총독 제10대(1944. 7- 1945.8)를 역임하였고 1945년 9.8일 미군사령관 하지중장의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돌아간 아베노부유키(1875-1953) 의 무시무시한 말을 전달한다.
함양 문화원의 식민사관이 바로 여기에서 연유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그러했지만 이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말로 할 단계는 지난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마지막 총독 노부유키의 말처럼 한국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말살시키는 100년전에 심어논 일본인들의 식민사관의 전파에 축사를 하고 발간사와 편찬위원에 이름을 올리고는 이것이 자자손손 그대로 전파가 지속되기를 기도하면서도 민족적인 죄의식이 전혀 없다는 말인가?
이제는 특히 역사문제에 있어서 잘못된 그들의 식민사학적인 판단을 기다리는 오류를 범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식민사학의 척결에 대한 정치적인 결단이 필요한 시기이다. 그들의 식민사학적 잘못된 판단을 기다리는 지방자치 단체장이나 문화담당관이 된다면 더 이상의 역사적인 진전은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2013년 4월
황석역사연구소장 박선호
잃어버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오래도록 황석산성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거창군사(居昌郡史)를 오래 동안 참고를 한 사람으로서 함양군사는 왜 없는가? 라는 반문과 함께 누구보다도 더 함양군사의 탄생을 기뻐하였다. 한권의 책을 만든다는 고통은 충분히 이미 알고 있기에 지역사회를 위한 지극한 사랑과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정과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수년간에 걸쳐서 자료를 조사하고 한 사건 한 사건을 밤잠을 설치면서 흩어진 사건들을 시대별로 모아서 역어나가는 그 노고는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함양의 후손들을 위하여 지금까지는 없었던 함양군사(咸陽郡史)를 만들어 낸 그 열정과 노고에 충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오래도록 염원하였던 함양군사의 탄생을 기다려온 사람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일고(一顧)한 소감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오래된 역사를 다시 만드는 것과도 같은 새로운 역사를 엮어 간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자료가 불충분하고 산재한 자료들이 왜곡되어 정사(正邪)를 구분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에 대하여 공감을 한다. 그러나 있는 자료는 왜곡하고 없는 자료를 일부로 만들어서 역사를 왜곡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공감을 할 수가 없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1. 황석산성 전투에 참여한 거창현, 안음현, 함양현의 입성인원을 35,00명이라고 근거도 없는 말을 만드는 행위,
2.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한 왜군의 규모를 일본인들이 말하는 대로 27,000명이라고 단정하는 행위
3. 황석산성의 함락 원인이 모두 백사림이 문을 열어주어 왜군이 들어 왔다고 하며 모든 책임을 백사림의 잘못으로 돌리는 행위
4. 역사적 사실의 근거를 일본인들이 조작한 선조의 수정실록을 근거로 하는 행위.
5. 황석산성 전투부대장들에게 보낸 풍신수길의 감사장에 남원성을 공격한 좌군대장 우기다 히데이에이를 등장시키는 행위, 등에 대하여
함양군민에게 2012년에 발간한 함양군사(咸陽郡史)의 기록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구분하여 설명을 드리고자 한다.
첫째로
황석산성 입성인원의 규모에 대한 설명
가. 당시에 같은 시기에 전개되었던 남원성 전투가 전개된 『만인의총』이라고 하는 남원성은 성의 둘레가 2,5km이고 황석산성의 둘레는 2,9km로 황석산성이 더 크다. 따라서 수용할 수 있는 면적이 황석산성이 더 크다.
나. 거창좌수 유명개는 사설교육기관인 공회소를 1577년도부터 안음현에 7개소를 거창현에 9개소를 만들어서 직접적으로 마을마다 순회를 하면서 백성들의 도리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고 1592년 임전쟁의 발발하자 왜군들의 상황을 수시로 보고를 하고 격문을 발하였으며 젊은 청장년들을 위천으로 불러서 군사훈련을 지속적으로 실시를 하였다.
따라서 유명개는 수시로 바뀌는 현감들보다 더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유명개의 년보(年譜)에 의하면 『성안이 자원하여 온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남원성에선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내용이다.
당시에 1594년 거창현감 박정완이나 1595년 권황 같은 현감들의 학정을 피하여 거창백성들이 집을 불사르고 산속으로 도망을 갔던 백성들도 군무장 유명개의 말은 믿고 의지하여 황석산성으로 입성을 하고 있다.
다. 유명개 년보에 의하면 거창 함양 안음현등의 각 현에서 천여명이 넘는 인원을 각 현감 등이 직접 인솔하여 입성을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현에서도 추가 또는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입성하여 식량의 추가수요를 일으켜 유명개의 아들들이 식량을 더 가져오고 있다.
라. 거창좌수 유명개나 안음현감 곽준이나 함양현감 조종도가 모두가 남명조식의 교육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사람들로 수기치인 실천궁행(修己治人 實踐躬行)의 실천유학(實踐儒學)을 몸소 행동했던 사람들로 등을 구분하지 않는 『만인이 평등한 대동사회(大同社會)의 이상을 꿈꾸는 철학을 가진 사람 』들이었고 그러한 유명개의 교육을 받았고 조종도의 영향을 받은 백성들이었다.
당시 관장들의 탐학과 명나라군의 착취와 왜놈들의 야만적인 약탈로 미루어 보면 정유재침략전쟁 중 가장피해가 극심했던 거창현과 안음현, 함양현은 거의 모든 백성들이 자진하여 입성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35,00명이 아니라 7,000여 명을 훨씬 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로
왜군의 참전규모 27,000명은 일본인들의 조작이다.
우선적으로 정유재침략을 위한 전투편성에서 일본전사나 양재숙의 『임진대전쟁』과 조중화의 『바로잡은 임진왜란사』에서 14만1천5백 여 명중 남원성을 공격한 좌군은 우기다히데이에를 대장으로 45,800명이고 황석산성을 공격한 우군은 모리데루모도를 대장으로 75,300명으로 되어있다.
함양군사에서는 일본인들이 조작한 『임진전란사』를 충실하게 준수하여 27,000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그것은 전주성에서 북진한 병력, 가도오기요마사 1만명과 나베시마나오시게 12,000명, 그리고 구로다나가마사군 5,000명으로 27,000명이다.
우선 언뜻 보아도 어떻게 전주성에서 북진한 왜놈과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한 왜놈의 숫자가 똑 같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전주성의 북진병력을 황석산성으로 그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궤멸된 황석산성전투의 참패를 숨기기 위하여 90%에 가까운 전사자와 부상자를 가진 모리데루모도와 조오소가베모도지가부대를 삭제를 하였고 구로다나가마사부대는 1만 명 중에서 7,000여명이 황석산성에서 사라졌다.
전주성에서 90% 이상이 궤멸된 모리데루모도 부대원 중 모리히데모도를 비롯한 길견광행, 돌호원속 등 2,000여명을 지원을 받아서 5천명을 만들어서 북진을 한 병력을 황석산성 전투에 그대로 기록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구로다나가마사부대원이 1만명이라는 사실은 전투편성이나 심지어 남원성도에서 마저 1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5천명이라고 함양군사에 기록을 하는 문화원의 저의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당시에 서문을 공격하여 함양현 사람들과 싸웠던 나베시마나오시게는 그의 고향 사료집에서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 등으로 미루어 보면 27,000명이라는 숫자는 황석산성 전투를 은폐하려는 조선총독부의 조작임에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위에서 제시한 여러 증거들이 증명을 하고 있다.
셋째로
황석산성의 함락 원인이 모두 백사림이 문을 열어주어 왜군이 들어 왔다고 하며 모든 책임을 백사림의 잘못으로 돌리는 행위는 못난 조선 사람들 끼리 다투다가 성이 함락되었다고 조선 사람들의 열등의식을 조장하는 행위다.
가. 성주 백사림에게 산성이 무너진 책임을 지우는 행위가 전투기간이 1597년 8월16일 하룻밤 동안을 기준으로하기 때문인데 군무장 유명개 년보에 의하면 백사림은 18일 유명개가 순찰을 하는 새벽까지 북문의 전투현장에 있었다.
나. 전투물자가 떨어지자 백사림이 먼저 탈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먼저 탈출을 하고 있다. 지족당 문집의 황석산성실적(黃石山城實跡)에 「군민이 놀라고 당황하여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알고 각자가 살길을 찾는데 초저녁이 되자 성을 넘어 탈출하는 자가 발생하였다.(군민경황 각계도생자 초혼유성도주자 불가승계 (軍民驚遑 各計圖生者 初昏踰城逃走者 不可勝計))」 라고 기록되어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백사림이 탈출을 하기 전에 백성들이 먼저 탈출을 하고 있는 것이 증명이 된다.
「읍혈이유지 효시이경지 성위병행이 종불가금알(泣血以諭之 梟示以警之 誠威竝行而 終不可禁遏)」이라는 지족당 문집의 기록처럼 곽준 안음현감과 군무장 유명개와 함양현감 조종도와 교위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나가지 말라고 호소도 해보고 목을 베겠다고 위협도 해보았지만 끝내는 탈출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백성들이 먼저 탈출을 하고 있다.
따라서 황석산성이 무너진 모든 것이 백사림 성주 한 사람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조선인은 못난 사람들이라서 별 수 없다는 열등감을 조장하려는 일본인들의 의도적인 전술이다.
다. 당시에 백사림의 심판을 담당했던 예조판서 심희수는 백사림이 탈출을 하는 그 시간에는 이미 왜놈들이 들어와서 혼자서 지킨다고 버텨보았자 지킬 수가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조정의 신하들이 조사했던 상황도 일리가 있다고 할 것이다.
라. 황석산성의 무너진 원인은 첫째로 체찰사 이원익이나 도원수 권율 등이 왜놈들의 숫자를 정확하게 예측을 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고 두 번째로는 충분한 전투물자를 준비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고 세 번째로는 황석산성에서 싸운 전투요원들이 일시적으로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에도 절대적으로 복종을 하고 터질 것 같은 심리적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훈련된 군인들이 아니라는 데에 원인이 있다.
만약에 곽준이나 유명개나 조종도가 나가지 말라고 말렸을 때 백성들이 싸울 수 있는 무기는 비록 없더라도 남아있는 돌이라도 던지고 함성이라도 지르면서 성문을 굳게 잠그고 기다렸다면 참지 못한 왜놈들은 스스로 무너져서 물러 갈수도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수시로 변하는 전장의 상황은 누구도 예측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넷째로
역사적 사실의 근거를 일본인들이 조작한 선조의 수정실록을 근거로 하는 행위는 크게 잘못 되었다. 선조의 수정실록은 모두가 일본이 수정한 것으로 일본인들의 의도가 가미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임금인 자신도 자신의 실록을 마음대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유명한 왕들도 자신에 대해서 사관이 어떻게 썼는지 궁금하였지만 『임금님이 보시면 다음 왕들도 보자고 할 것이니 그러면 사관이 기록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라고 신하들이 보지를 못하게 하자 그대로 따랐다. 따라서 선조의 수정실록이 일본제국주의 시대 이전에도 있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수정실록이 역사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아닌지는 개념이 확실하게 서게 될 것이다.
일본 총독부가 한국의 역사자료들을 조작하기 위하여 「공명정대한 역사를 만든다.」라고 하면서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책들을 총독부로 제출케 하여 1910년 11월부터 1911년 말까지 5차례의 대대적인 작업을 실시했고 1937년까지 지속적으로 수정작업을 하였고 수정하지 못하는 것은 불태워 그 숫자가 20여 만 권에 이른다고 한다. 따라서 문위의 『모계문집』이나 정경운의 『고대일기』 등도 그때에 수정이 되어졌을 것이다.
다섯째로
황석산성 전투부대장들에게 보낸 풍신수길의 감사장에 남원성을 공격한 좌군대장 우기다 히데이에이를 그대로 등장시키는 행위, 등에 대하여
참으로 고약한 일이다.
함양군사의 작업을 오늘날에 와서 다시 시작하는 일은 일본인들이 말하는 옛날 역사책을 그대로 베껴서 전달하기 위한 작업은 아닐 것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없는 예산을 염출하여 새롭게 역사작업을 하는 것은 잘못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자라나는 후손들에게는 올바른 역사를 전달하고 가르치기 위한 중차대한 목적을 가진 작업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양군사에는 일본인들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서 일본인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전파를 하고 있다.
함양군사에 의하면 황석산성에 오지도 않은 「우기다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황석산성에서 전투를 하고 있고 황석산성에서 궤멸된 우군대장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는 없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행위를 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함양군사는 일본인들의 의도를 그대로 충실하게 전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판단된다. 역사를 잘 알지도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혼돈을 조장하려는 일본의 숨은 의도를 생각지도 않은 채 일본인들의 의도적인 거짓말을 신처럼 신봉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황석산성 참전병력의 규모는 75,300명이 아닌 27,000명이고 절대로 고칠 수가 없다고 선언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 중에 일본인들이 말하는 것에 더하여 배달민족의 잘못된 점이나 부끄러운 점만을 강조하여 민족적인 열등의식과 패배주의를 심으려고 노력하는 식민사학지들도 있고 민족적인 주체의식이 확고한 민족사학자도 존재한다.
한번 둘러본 함양군사는 함양군민들에게 나아가서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패배주의와 열등의식을 전파하려는 식민사관의 입장에서 일본인들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황석산성 입성인원을 3,500명이라고 출처나 근거도 없이 기록하고 있다. 역사서를 기술하는 것은 개인적인 소신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함양군사가 거창군사와 다른 점은 거창군사는 새로운 내용이나 새로운 년대를 포함하는 곳에는 반드시 관련근거를 밝혀 객관성을 유지하려도 노력을 하였으나 함양군사에는 근거를 확실하게 밝히지 않아 개인적인 소견인지 아닌지 불명확한 부분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민족사관이란?
배달민족이 역사의 주체임을 밝히는 것이고 대한민국의 지정학적인 위치가 주변국의 변두리가 아니라 중심임을 밝히는 일이며, 배달민족의 장점과 우월감을 키워서 배달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하여 당당한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하는 것이며, 대한민국 국민에게 분명한 목표의식을 심어주고 열정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민족사관이다.
마찬지로 내가 태어난 고향 땅이 자랑스러워야 하고 고향이 중심이 되고 무엇인가는 향토애를 가지고 열정적으로 노력하도록 만드는 것이 지방자치단체에서 할 수 있는 민족사관을 정립하는 일이다.
임진전쟁 시에 의병도대장 김면이나 정인홍이나 화왕산성의 곽재우나 황석산성의 조종도나 유명개나 곽준이나 황석산성에서 산화하신 7천 여 명의 잃어버린 영혼들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한사람의 영혼이라고 더 찾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로부터 교훈을 찾아 다시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한 것이 역사를 바로세우는 작업이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들마저 폄하하고 일본인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는 행위는 당연히 식민사관이다. 대한민국의 함양문화원에 이렇게 얼빠진 식민사관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대하여 깊은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식민사학자의 대표인 이병도도 죽을 때는 눈물을 흘리며 반성을 하고 죽었다는데 아직도 함양의 문화원이 식민사관을 생산하는 산실이 되는 우(愚)를 범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식민사학자는 책을 만들어서는 안 되고 번역을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은 청소년들과 국민들에게 목표의식을 사라지게 하고 열정을 빼앗아 가며 생활에 대한 염증과 우울증을 만들고 무기력하고 무능한 사람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롭게 시작한 함양군사는 일본인들의 조작된 이야기와 일본인의 의도를 그대로 전달함으로서 많은 예산과 수년간에 걸친 작업의 의미와 가치를 감소시켰고 세월과 함께 더 많은 국민과 청소년들의 역사의식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식민사관으로 오염을 시킬 것이며 함양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게 될 것이다.
일제로부터 독립을 한지도 벌써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일본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는 원인은 곳곳에 뿌리내린 이와 같은 식민사관에 빠진 사람들 때문이다.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조선총독 제10대(1944. 7- 1945.8)를 역임하였고 1945년 9.8일 미군사령관 하지중장의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돌아간 아베노부유키(1875-1953) 의 무시무시한 말을 전달한다.
함양 문화원의 식민사관이 바로 여기에서 연유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그러했지만 이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말로 할 단계는 지난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마지막 총독 노부유키의 말처럼 한국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말살시키는 100년전에 심어논 일본인들의 식민사관의 전파에 축사를 하고 발간사와 편찬위원에 이름을 올리고는 이것이 자자손손 그대로 전파가 지속되기를 기도하면서도 민족적인 죄의식이 전혀 없다는 말인가?
이제는 특히 역사문제에 있어서 잘못된 그들의 식민사학적인 판단을 기다리는 오류를 범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식민사학의 척결에 대한 정치적인 결단이 필요한 시기이다. 그들의 식민사학적 잘못된 판단을 기다리는 지방자치 단체장이나 문화담당관이 된다면 더 이상의 역사적인 진전은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2013년 4월
황석역사연구소장 박선호
[답변]함양군사(咸陽郡史) 일고유감(一顧有感)
- 작성일
- 2013-04-23 09:23:13
- 작성자
- 문화관광과
1. 귀하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2. 귀하께서 게시한 "함양군사 일고유감"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답변하겠습니다.
답변 내용 : 함양군사는 함양군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집대성하여 지역발전과 문화 창달에 기여하고자 편찬 하였습니다. 집필자료는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정사를 주로하고 동국여지승람, 경상남도사, 함양군지, 함양군행정자료 및 주변시군과 각종 자료를 참고로 하여 집필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건은 함양군사가 역사적 고정을 통한 작업은 아니고, 정유재란사의 정확한 고증 또한 학계에서 전문적 검토가 되지 않았습니다. 박선호 선생의 자료를 참고하여 앞으로 함양군에서 개정판을 낼 때 수정 보완하여 더 좋은 군사로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항상 고향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견을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끝.
2. 귀하께서 게시한 "함양군사 일고유감"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답변하겠습니다.
답변 내용 : 함양군사는 함양군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집대성하여 지역발전과 문화 창달에 기여하고자 편찬 하였습니다. 집필자료는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정사를 주로하고 동국여지승람, 경상남도사, 함양군지, 함양군행정자료 및 주변시군과 각종 자료를 참고로 하여 집필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건은 함양군사가 역사적 고정을 통한 작업은 아니고, 정유재란사의 정확한 고증 또한 학계에서 전문적 검토가 되지 않았습니다. 박선호 선생의 자료를 참고하여 앞으로 함양군에서 개정판을 낼 때 수정 보완하여 더 좋은 군사로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항상 고향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견을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끝.
- 담당
- 행정과 행정담당(비서실) (☎ 055-960-5001)
- 최종수정일
- 2024.07.03 13:1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