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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함양의 식민사관과 문어(文魚)
- 작성일
- 2013-05-11 07:48:15
- 작성자
- 박선호
뿌리깊은 함양의 식민사관과 문어(文魚)
『함양군사 일고유감』에 대한 군수님의 답변을 보고 문어(文魚)머리가 생각이 났다. 옛날에 함양, 안의, 거창이라고 하면 교통이 아주 불편하여 삼천포에서 잡은 생생한 갈치가 덕유산, 금원산까지 오다가 보면 썩어서 목이 툭 떨어진다. 그러한 썩은 갈치만을 먹던 깊은 산중에서 무슨 문어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갑자기 문어(文魚)가 생각이 났다.
문어(文魚)는 무척추동물 중 지능이 가장 높다.
자기를 해치려는 적에겐 강하게 먹물을 뿜지만 장난칠 때는 약하게 내 뿜을 정도로 영리하고 문어에게 잼이 든 유리병을 주면 발로 병뚜껑을 열고 색깔이 다른 공도 구별한다고 한다. 문어(文魚)라는 이름은 공부를 많이 한 선비처럼 먹물을 가진 물고기라는 뜻에서 지어졌다.
수족관의 문어는 금세 사육사의 얼굴을 알고 심지어 고등동물의 특징인 '장난'을 치기도 한다. 뛰어난 학습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문제해결 능력을 배우고 실제로 그것을 응용할 수 있다. 물을 뿜어 펄을 불어낸 다음 그 속에 숨어 있던 게나 새우를 잡아내기도 한다.
물고기처럼 몸통과 지느러미를 이용해 헤엄을 치지 않는다. 몸속에 물을 가득 머금은 후 한 번에 내뿜어 움직이며 로켓이 날아가는 원리, 즉 제트추진 방식을 사용한다. 문어는 머리가 좋기로 유명하며 사람과 맞먹는 시력을 가지고 있다. 수명이 1∼2년밖에 되지 않는 것에 비해 엄청난 지능을 가져 놀라움을 자아낸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만약에 그들이 어떤 기록수단을 가지고 간접체험을 할 수가 있었다면 그들은 인간을 지배 할 수도 있을 정도라고 말을 한다. 오직 체험에 의한 학습으로 1년이나 2년이라는 당대에서 모든 것이 끝나고 전수가 되지 않기 때문에 문어일 뿐이다.
언젠가는 그들에게 직접체험이 기록으로 남겨져서 간접체험으로 전수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그들은 인간을 지배하려고 할런지도 모른다.
【『함양군사일고유감』에 대한 함양군수님의 답변
1. 귀하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2. 귀하께서 게시한 "함양군사 일고유감"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답변하겠습니다.
답변 내용 : 함양군사는 함양군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집대성하여 지역발전과 문화 창달에 기여하고자 편찬 하였습니다. 집필자료는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정사를 주로하고 동국여지승람, 경상남도사, 함양군지, 함양군행정자료 및 주변시군과 각종 자료를 참고로 하여 집필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건은 함양군사가 역사적 고정을 통한 작업은 아니고, 정유재란사의 정확한 고증 또한 학계에서 전문적 검토가 되지 않았습니다. 박선호 선생의 자료를 참고하여 앞으로 함양군에서 개정판을 낼 때 수정 보완하여 더 좋은 군사로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항상 고향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견을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끝. 』】
답변 중 함양군사의 편찬목적은
1. 함양군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집대성하여 지역발전과 문화창달에 기여코자 한다.
2. 집필 자료는 위에 제시한 여러 가지 자료를 참고하였다.
3. 정유재란사는 아직까지 학계에서 전문적인 검토가 되지 않았다.
4. 언제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앞으로 보완 할 때에 수정보완을 하겠다.
라는 것이 답변의 요지다.
나는 오랫동안 거창군사를 참고를 한사람으로서 함양군의 군사편찬의 목적은 참으로 기다리던 일이요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咸陽郡史 一顧有感」 에서 밝힌 바와 같이 객관성이 결여되고 일본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전수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통분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함양의 문화원이 함양군사를 통하여 식민사관을 확대 재생산 전파하려는 목적을 가진 이상, 문화창달은 커녕 백범 김구와 같은 민족정신이 뚜렷한 분이 함양에 계신다면 함양문화원은 그자리에 그대로 존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일본이 황석산성 전투를 조작한 이유는
가.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끼의 말처럼 식민사관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조선인은 일본인과 싸우면 반드시 진다. 그것도 일본인과 직접 전투를 해서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진다는 것이 일본인들이 조작하여 놓은 황석산성 전투다.
일본인은 조선의 역사는 망하는 역사라고 쓴다.
백제도 망하고 고구려도 망하고 신라도 망하고 조선도 그래서 망한다. 이 지구상에 망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유독 조선이라는 나라만이 망한 것처럼 기술한다. 로마도 망하고 명나라도 망하고 모두가 다 망했다. 왜 한국의 역사는 망한 것만이 기록을 해야 하는지? 백제, 고구려 , 신라, 고려, 조선이라는 나라가 수백 년 씩이나 유지되는 비결은 왜 기록하지 않는가? 이 지구상의 어느 나라가 신라, 고구려, 백제, 조선처럼 수백 년씩이나 유지하면서 훌륭한 문화를 가진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어느 대륙에 이와 같이 오래도록 찬란한 문화를 꽃을 피운 나라가 있는지 ? 이렇게 오래도록 훌륭한 문화를 가진 나라는 지구상의 아무 곳에도 없다.
만약에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소설 대망(大望)을 일본인들이 조선의 역사를 쓰듯이 쓴다면
나. 일본인들이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인원 75,300명을 삭제하고 전주성에서 북진한 병력인 27,000명을 그대로 기록한 것은 황석산성에서 일본인들이 한명도 죽지를 않았다는 것으로 조작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황석산성 전투는 일본이 일방적으로 승리한 전투로 그냥 일본인들이 한번 다녀갔고 조선인들만이 죽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엄청난 역사적인 음모다.
일본인들이 기록한대로 황석산성에 왜놈들이 75,300명이 왔었고 5일간의 전투결과 그들이 인정한 대로 27,000명만이 살아서 도망을 갔다. 나머지 48,300명은 죽었거나 부상을 당하여 북진에 참여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모리데루모도 3만명, 조오소가베모도지가 1만3천3백명, 구로다나가마사 5천명이다. 이것은 조선의 기록이 아니라 시마쓰요시히로(島津義弘)의 종군승인 멘고렌조보(面高連長防)의 고려일기(高麗日記)에 모리데루모도와 조오소가베 모두지가 두 개 부대는 완벽하게 궤멸되어 우군대장의 명예와 히로시마 성주라는 직함도 다 벗어던지고 전주성과 전남장성군진원현과 나주현으로 쫓겨 다니는 것이 일본인의 기록이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1만 명이 황석산성에 참전을 했다가 7천명이 죽었고 3천명만이 살아서 전주성에 갔다가 모리데루모도 3만의 부대원 중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를 비롯하여 기동력이 있는 2천명을 지원을 받아서 5천명이 되어 북진을 했다. 황석산성 전투에서 왜놈들이 한명도 죽지 않았다고 조작하기 위하여 구로다 나가마사의 병력은 5천명으로 축소가 되었다.
일본은 신국(神國)이라 절대로 패할 수 없다는 것으로 조작하기 위하여 조선에서 일본군들이 패했다는 흔적은 모두 지워버렸다. 그래서 가도오기요마사가 패했다는 기록인 함경도 길주에 있었던 정문부의 북관대첩비도 일본인들이 가져갔었고 황석산성의 전투도 그렇게 조작이 되어 버렸다.
함양문화원은 함양군민의 돈으로 咸陽郡史를 쓰면서 함양군민이나 대한민국의 국민을 위하여 올바른 역사를 기록하려 하지 않고 1910년 일본인들이 조선의 역사서를 검열하고 조작하고 조작할 수 없었던 20만 여권을 불태우며 식민사관을 심으려고 했던 그 내용을 일본총독부를 대신하여 그대로 옮겨서 적고 있다.
이것은 마치 마지막총독 아베 노부유끼가 「나는 패하여 돌아가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온다.」라고 했던 것처럼 죽었던 그가 다시 돌아 온 것과도 같은 역할을 함양의 문화원이 하고 있다. 이것은 함양문화원에 뱀처럼 도사린 식민사관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말해주는 단적인 예가 될 수가 있을 것이다.
함양군사에 기록에 의하면 식민사관의 전파에 참여하신 집필위원님들은
집필위원장 김성진
집필위원 김윤수 김찬수 김흥식 박영일 소재우 양정렬 유성기 임채갑 정문상 정상기 정수상 홍동초 등 이상 13명이다.
이분들이 누구인지? 어떤 분들인지는 잘 모른다.
함양군사가 거창군사와 다른 점은 거창군사는 새로운 내용일 때는 반드시 근거를 밝혔고 최소한 근거가 없는 자료를 만들어서 기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위에 기록된 집필진 여러분들이 100여 년 전에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민족적 패배주의와 열등감을 이식하려는 식민사관의 내용을 함양의 군사에 그대로 옮겨서 적어놓고 근거도 없는 자료는 만들어서 조작하여 놓았다.
물론 집필위원님 중 어떤 사람은 철저하게 일본인들의 교육을 받고 일본인이 되어 일본을 위해서 열정을 가지고 함양군사의 작성에 임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분은 식민사관에 빠져서 식민사관인지 민족사관인지 구분이 안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은 식민사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일본인들의 식민사관의 내용들이 가감 없이 그대로 인쇄되어 전국으로 배포된 사실을 미루어 보면 함양문화원에 이름을 올리고 활동을 하는 이러한 분들은 일본인들이 뿌려놓은 식민사관의 맹종 또는 추종하는 분들임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다른 일반 행정기관도 아닌 함양의 정신문화를 새롭게 해야 할 함양문화원이 식민사관에 오염된 정도가 이렇게 심각할 줄은 군민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함양의 식민사관이 얼마나 뿌리가 깊은가 ?
그 깊이를 알고 싶으면 함양이 자랑하는 상림 숲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상림 숲은 함양사람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신라시대에 고운 최치원선생님이 함양태수로서 계실 때 매년 지속되는 홍수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축성을 한 것이 상림 숲이라고 알고 있다. 지방관으로서 백성을 위한 권력의 행사가 바로 이러한 것이라는 권력행사의 진수를 보여 준 것이다. 지방관으로서 작은 권력의 행사였겠지만 그의 행위는 천년을 넘어 오늘 날에도 백성들이 그분을 존경하고 생각토록 하는 훌륭한 업적이다.
그런데 그의 『문창후최선생 신도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중국에서 벼슬을 하다가 신라에 돌아온 뒤에 당시 국정의 문란함에 실망하여 대산, 천령, 부산 등의 태수를 지내다가 마지막에는 해인사 가야산에 은거하여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상의 시시비비를 달관했을 함양태수 최치원선생님을 한낱 시중 잡배와 같은 불평불만자로 기록하여 신라 최고 지식인의 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리고 함양이라는 지역은 중앙정부에 대하여 불평불만 품은 자들이 귀양이나 오는 곳으로 스스로 함양군을 폄하하고 있다.
작은 권력이라도 어떻게 행사를 하는 것이 진정한 백성들을 위한 것인가라는 권력행사의 진수를 보여준 수백만 공무원과 공직자들에게 귀감으로만 남았어도 얼마나 좋았을 텐데, 세월을 뛰어넘는 민족 최고의 지식인을 불평불만자로 격하하고 아름다운 함양을 불평불만 자들의 일시적인 귀양지로 비하를 시키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뿌리 깊은 함양에 박힌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함양문화원에서 발행한 함양군사에 일본의 식민사관에 근거한 식민사관의 확대 전파와 조상의 폄하와 고향을 비하하는 시발점은 상림의 『문창후신도비문』에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뿌리 깊은 식민사관의 영향은 식민사관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함양군의 정치, 경제, 사회, 군민의 생활전반에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민선지방자치가 시작된 이래 함양의 지방자치능력은 전국에서 가장 크게 의심을 받고 있는 것도 모두가 함양에 내린 뿌리 깊은 일본인들이 심어놓은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함양의 지방자치는 주어진 함양자원의 활용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이 되어야 하나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며 왕년에 자랑하든 좌안동우함양의 문화적 긍지가 사라진지는 아주 오랜 옛날일이 되어 버렸다.
상급정치기관인 도나 중앙정부 등의 각 부처나 요소요소의 인적자원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지역에서 역사적인 조건이나 자연자원의 활용을 극대화를 병행했을 때만이 지방자치의 궁극적인 목적인 군민행복의 향상과 국가역량의 확대에 기여한다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고나 보조금을 받아서 자기들끼리 잔치나 벌이며 먹고사는 것, 그 이상의 가치는 없는 것이며 그것은 중앙정부나 상급기관에 빌붙어서 먹고사는 기생적인 지방정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식민사관에서 발생하는 자기 조상의 격에 대한 폄하와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 대하여 비하를 하면 할수록 자기조상이나 자신의 고향에 대한 애착이 생길 수가 없고 애착이 없는데 주인정신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러한 식민사관의 영향에서 나오는 선거풍토는 함양의 자연자원 활용의 극대화나 군민의 행복이나 경제능력의 확대보다는 그 마을에서 즉 지방자치단체장의 선거에 도움이 되는가아닌가 만이 선거의 쟁점이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선거가 되어 왔다.
권력의 주체요 인격체인 군민을 오직 표로서만 보았기 때문에 표가 나오지 않았으면 선거후에는 전체적인 자연자원 활용의 극대화나 정치적인 포용은 사라지고 행정의 보복으로 이어진 것이 함양이다. 마치 일본 제국주의시대에 일본 놈들이 조선인을 다루듯이 군민을 하나의 선거도구로만 보고 고향을 단체장들의 개인적인 축재의 시장이나 출세의 수단으로만 보기 때문에 부정과 비리가 발생한다.
그래서 함양의 지방자치능력은 전국에서도 가장 큰 의심을 받고 있고 이미 수차례의 보궐선거로서 증명이 되었고 상급정치기관에서 파견된 다른 지역출신의 책임자들로부터 통치를 받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러한 자치능력이 가장 의심을 받게 되는 몇 가지 행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선거결과 표가 나오지 않았다고 하여 지방자치단체의 보복행정이 실시되는 대표적인 곳이 안의면 귀곡마을이다.
거창군마리면대동리와의 경계에 위치한 귀곡리는 마천면이 대홍수를 겪은 후 자연재해특별지구로 지원된 수천억원의 지원금으로 전 함양군의 하천을 파고 뜯고 고치고 하는 데도 귀곡리 하천에는 돌 하나 들어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자연그대로 방치되고 있으며 마을의 중앙에 흐르는 개울은 철관을 묻고 시멘트로 덧씌워서 하천의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하여 버렸고 수백년 내려오는 그대로 동네가운데를 통관하는 길이 없어서 작은 동네를 그냥 한 바퀴를 도는데도 30분 이상 소요가 되고 산악지대에는 계획적이고 정상적인 임도나 농로가 없어서 자연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산 중에는 썩어서 자빠진 나무 때문에 산사태가 나고 나무가 또다시 쓰러져서 방치되는 악순환이 계속이 되어도 주민은 땔감을 구할 수가 없을 지경으로 되었고 「귀곡교」 라는 교량은 귀곡리에서도 2km나 멀리 떨어진 남의 마을에 만들어져서 마치 죽어서 자빠진 황소를 보는 듯 그 다리를 보는 주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러한 전시적인 보복행정의 표본이 화석처럼 함양에 굳어 있고 앞으로 이것은 보복행정의 표본으로 행정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연구대상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 방치가 되는지? 보복행정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볼일이다. 보복행정을 당하고도 그것이 보복인지도 모르는 순진한 분들에게 이렇게 고통을 주어도 되는 것일까?
이러한 왜곡현상은 애향심과 주인정신의 결여를 유도한 식민사관에서 시작된다.
뿌리 깊은 함양의 식민사관은 바로 상림의 『문창후최치원선생의 신도비』에서 『함양군사』에서 를 확대 재생산하고 전파하는 함양문화원에 깊숙이 박힌 식민사관의 영향 때문이다.
둘째로 함양군의원 중 어느 분이 황석산성의 역사를 중앙정부에서 연구를 해주면 좋겠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하는 의원이 있는가 하면 『함양군사 일고유감』에 대한 답변으로 정유재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학계나 전문가의 검토가 이루어 지지 않았다.」라고 했는데 역사적인 사실, 특히 심심산골 지방의 역사에 대해서 중앙정부나 학계나 전문가가 연구를 해주거나 검토해 주지를 않는다. 어느 역사든지 지방의 역사가 없는데 중앙의 역사는 있을 수 없다. 지방의 역사가 뭉쳐서 전체적인 중앙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방의 역사는 지방자치단체에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해야 한다. 그 지방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데 중앙정부에서 관심을 가져 줄 리는 절대로 없다. 역사에 관한한 지금까지의 사례가 그렇다. 서대문형무소, 동대문문화역사관, 등등의 모든 역사연구가 중앙정부에서 한 것이 아니라 해당 군이나 각 구청에서 용역을 주어 연구한 결과물인 것이다.
보복행정과 함양에군에서 스스로 해야할 일을 중앙에서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주인정신의 결여와 지방자치능력의 부족에서 기인된다.
함양군에 오염된 뿌리 깊은 식민사관을 배제하기 위하여 함양군에서 해야 할 일은
첫째로 먼저 함양군의 이름으로 발간된 함양군사가 일본인들의 의도적인 식민사관을 확대 재생산하고 전파하는 도구가 되도록 방치를 해서는 안 될 것이며 그것도 미래 어느 시점에 가서 할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에 회수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둘째로는 함양군에 뿌리 깊게 형성된 식민사관의 영향 아래에서 기록된 식민사관의 흔적을 찾아서 삭제하고 수정하는 문화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지방자치의 근본 목적인 지역사회 자연자원의 활용의 극대화방안을 찾아 모든 군민의 행복추구와 지방정부로서 국가능력의 향상에 기여하는 방안을 찾아야 하고 군민을 선거의 도구로만 생각하고 고향을 사적인 이익을 실현하는 시장으로 생각하는 행위를 배척하고 기관장이나 군의원님들은 단체장이 보복행정을 하도록 방치를 하거나 이러한 행위를 옹호하는 풍토를 과감하게 배척하여 함양의 자치능력을 회복하거나 또는 배양하는 내부운동이 필요하다.
함양군에서 살고 있는 함양인의 입장에서는 지구의 중심은 함양이고 지구의 주인은 함양군민이라는 사실이 진리이고 그것을 믿는 것이 주인정신이고 민족사관이다.
셋째로는 7년 임진전쟁을 종료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도 일본인들의 조작과 만행으로 잃어버린 위대한 함양인과 거창인의 역동적이고도 자랑스러운 극난극복의 역사를 찾는 를 연구하는 특별 T/F 팀을 구성하고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지속적이고 전문적인 연구를 하여 보완하고 또 보완을 해야 할 것이다.
황석산성이 위치한 함양군이 자신의 역사에 관심을 갖지 않는데 거창군이나 중앙에서 스스로 연구를 하겠다고 나서 줄 사람 아무도 없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1억 원의 군비를 낭비를 하고도 아무런 결과도 없는 『黃石山城 戰鬪 考證硏究 2009』와 같은 그런 방향설정이 잘못된 실수는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다.
낭비의 원인은 잘못된 연구를 하도록 방치하고 조장한 사람에게 그 책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잘못된 선택이나 집행을 이유로 “지난번에 한번 지원을 했는데 또 무슨 지원이냐?” 고 하는 고루한 관료들의 발상인 라는 “갑”이 “을”에게 특혜를 주는 식의 시혜적인 위치가 아니라 이라는 주인정신을 갖는 발상의 대전환으로 잃어버린 역사! 황석산성에 접근을 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최치원 함양태수가 지방관으로서의 권력행사가 천년이 지난 후에도 백성들에게 존경과 칭송을 받게 하는 상림 숲처럼 모든 공직자는 순간적인 안일을 위하거나 비굴한 출세를 위하여 아부를 할 것이 아니라 이를 배척하고 내가 가진 작은 권한의 행사가 바로 천년 후에도 국민들의 칭송을 받을 수가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며 주어진 직책에 따른 권력행사의 진수를 보여 준다면 그것이 바로 『함양군사(咸陽郡史)』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뿌리 깊은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길이 될 것이며 전국적으로 의심을 받고 있는 함양의 지방자치능력이 개선되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머리통 속에 먹물이 가득한 문어는 아주 영리하지만 자신의 생활을 기록하는 수단이 없어서 영원히 문어(文魚)가 될 수가 있어나 식민사관에 오염된 사람은 문어머리와 같이 머리통 속에 먹물이 가득하여도 오히려 그 먹물이 국민과 자라나는 청소년을 패배주의에 빠지게 하고 열정을 사라지게 만들고 열등한 국민과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드는 식민사관을 지속적으로 전파를 하여, 결과적으로 민족과 자신을 망가뜨리는 사람이 된다.
문어는 머리는 좋지만 기록된 문서가 없어서 세상을 지배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자기 종족을 위하여서는 기꺼이 희생을 한다. 연체동물인 문어(文魚) 보다도 훨씬 못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식민사관에 빠진 그들은 책을 만들어서도 안 되고 번역을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이 하는 행위 자체가 모두 대한민국과 국민과 청소년들을 오염을 시키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아직도 단체장이나 문화담당자가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하고 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판단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행정가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끝
황석역사연구소장 박선호
『함양군사 일고유감』에 대한 군수님의 답변을 보고 문어(文魚)머리가 생각이 났다. 옛날에 함양, 안의, 거창이라고 하면 교통이 아주 불편하여 삼천포에서 잡은 생생한 갈치가 덕유산, 금원산까지 오다가 보면 썩어서 목이 툭 떨어진다. 그러한 썩은 갈치만을 먹던 깊은 산중에서 무슨 문어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갑자기 문어(文魚)가 생각이 났다.
문어(文魚)는 무척추동물 중 지능이 가장 높다.
자기를 해치려는 적에겐 강하게 먹물을 뿜지만 장난칠 때는 약하게 내 뿜을 정도로 영리하고 문어에게 잼이 든 유리병을 주면 발로 병뚜껑을 열고 색깔이 다른 공도 구별한다고 한다. 문어(文魚)라는 이름은 공부를 많이 한 선비처럼 먹물을 가진 물고기라는 뜻에서 지어졌다.
수족관의 문어는 금세 사육사의 얼굴을 알고 심지어 고등동물의 특징인 '장난'을 치기도 한다. 뛰어난 학습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문제해결 능력을 배우고 실제로 그것을 응용할 수 있다. 물을 뿜어 펄을 불어낸 다음 그 속에 숨어 있던 게나 새우를 잡아내기도 한다.
물고기처럼 몸통과 지느러미를 이용해 헤엄을 치지 않는다. 몸속에 물을 가득 머금은 후 한 번에 내뿜어 움직이며 로켓이 날아가는 원리, 즉 제트추진 방식을 사용한다. 문어는 머리가 좋기로 유명하며 사람과 맞먹는 시력을 가지고 있다. 수명이 1∼2년밖에 되지 않는 것에 비해 엄청난 지능을 가져 놀라움을 자아낸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만약에 그들이 어떤 기록수단을 가지고 간접체험을 할 수가 있었다면 그들은 인간을 지배 할 수도 있을 정도라고 말을 한다. 오직 체험에 의한 학습으로 1년이나 2년이라는 당대에서 모든 것이 끝나고 전수가 되지 않기 때문에 문어일 뿐이다.
언젠가는 그들에게 직접체험이 기록으로 남겨져서 간접체험으로 전수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그들은 인간을 지배하려고 할런지도 모른다.
【『함양군사일고유감』에 대한 함양군수님의 답변
1. 귀하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2. 귀하께서 게시한 "함양군사 일고유감"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답변하겠습니다.
답변 내용 : 함양군사는 함양군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집대성하여 지역발전과 문화 창달에 기여하고자 편찬 하였습니다. 집필자료는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정사를 주로하고 동국여지승람, 경상남도사, 함양군지, 함양군행정자료 및 주변시군과 각종 자료를 참고로 하여 집필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건은 함양군사가 역사적 고정을 통한 작업은 아니고, 정유재란사의 정확한 고증 또한 학계에서 전문적 검토가 되지 않았습니다. 박선호 선생의 자료를 참고하여 앞으로 함양군에서 개정판을 낼 때 수정 보완하여 더 좋은 군사로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항상 고향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견을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끝. 』】
답변 중 함양군사의 편찬목적은
1. 함양군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집대성하여 지역발전과 문화창달에 기여코자 한다.
2. 집필 자료는 위에 제시한 여러 가지 자료를 참고하였다.
3. 정유재란사는 아직까지 학계에서 전문적인 검토가 되지 않았다.
4. 언제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앞으로 보완 할 때에 수정보완을 하겠다.
라는 것이 답변의 요지다.
나는 오랫동안 거창군사를 참고를 한사람으로서 함양군의 군사편찬의 목적은 참으로 기다리던 일이요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咸陽郡史 一顧有感」 에서 밝힌 바와 같이 객관성이 결여되고 일본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전수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통분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함양의 문화원이 함양군사를 통하여 식민사관을 확대 재생산 전파하려는 목적을 가진 이상, 문화창달은 커녕 백범 김구와 같은 민족정신이 뚜렷한 분이 함양에 계신다면 함양문화원은 그자리에 그대로 존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일본이 황석산성 전투를 조작한 이유는
가.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끼의 말처럼 식민사관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조선인은 일본인과 싸우면 반드시 진다. 그것도 일본인과 직접 전투를 해서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진다는 것이 일본인들이 조작하여 놓은 황석산성 전투다.
일본인은 조선의 역사는 망하는 역사라고 쓴다.
백제도 망하고 고구려도 망하고 신라도 망하고 조선도 그래서 망한다. 이 지구상에 망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유독 조선이라는 나라만이 망한 것처럼 기술한다. 로마도 망하고 명나라도 망하고 모두가 다 망했다. 왜 한국의 역사는 망한 것만이 기록을 해야 하는지? 백제, 고구려 , 신라, 고려, 조선이라는 나라가 수백 년 씩이나 유지되는 비결은 왜 기록하지 않는가? 이 지구상의 어느 나라가 신라, 고구려, 백제, 조선처럼 수백 년씩이나 유지하면서 훌륭한 문화를 가진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어느 대륙에 이와 같이 오래도록 찬란한 문화를 꽃을 피운 나라가 있는지 ? 이렇게 오래도록 훌륭한 문화를 가진 나라는 지구상의 아무 곳에도 없다.
만약에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소설 대망(大望)을 일본인들이 조선의 역사를 쓰듯이 쓴다면
나. 일본인들이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인원 75,300명을 삭제하고 전주성에서 북진한 병력인 27,000명을 그대로 기록한 것은 황석산성에서 일본인들이 한명도 죽지를 않았다는 것으로 조작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황석산성 전투는 일본이 일방적으로 승리한 전투로 그냥 일본인들이 한번 다녀갔고 조선인들만이 죽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엄청난 역사적인 음모다.
일본인들이 기록한대로 황석산성에 왜놈들이 75,300명이 왔었고 5일간의 전투결과 그들이 인정한 대로 27,000명만이 살아서 도망을 갔다. 나머지 48,300명은 죽었거나 부상을 당하여 북진에 참여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모리데루모도 3만명, 조오소가베모도지가 1만3천3백명, 구로다나가마사 5천명이다. 이것은 조선의 기록이 아니라 시마쓰요시히로(島津義弘)의 종군승인 멘고렌조보(面高連長防)의 고려일기(高麗日記)에 모리데루모도와 조오소가베 모두지가 두 개 부대는 완벽하게 궤멸되어 우군대장의 명예와 히로시마 성주라는 직함도 다 벗어던지고 전주성과 전남장성군진원현과 나주현으로 쫓겨 다니는 것이 일본인의 기록이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1만 명이 황석산성에 참전을 했다가 7천명이 죽었고 3천명만이 살아서 전주성에 갔다가 모리데루모도 3만의 부대원 중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를 비롯하여 기동력이 있는 2천명을 지원을 받아서 5천명이 되어 북진을 했다. 황석산성 전투에서 왜놈들이 한명도 죽지 않았다고 조작하기 위하여 구로다 나가마사의 병력은 5천명으로 축소가 되었다.
일본은 신국(神國)이라 절대로 패할 수 없다는 것으로 조작하기 위하여 조선에서 일본군들이 패했다는 흔적은 모두 지워버렸다. 그래서 가도오기요마사가 패했다는 기록인 함경도 길주에 있었던 정문부의 북관대첩비도 일본인들이 가져갔었고 황석산성의 전투도 그렇게 조작이 되어 버렸다.
함양문화원은 함양군민의 돈으로 咸陽郡史를 쓰면서 함양군민이나 대한민국의 국민을 위하여 올바른 역사를 기록하려 하지 않고 1910년 일본인들이 조선의 역사서를 검열하고 조작하고 조작할 수 없었던 20만 여권을 불태우며 식민사관을 심으려고 했던 그 내용을 일본총독부를 대신하여 그대로 옮겨서 적고 있다.
이것은 마치 마지막총독 아베 노부유끼가 「나는 패하여 돌아가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온다.」라고 했던 것처럼 죽었던 그가 다시 돌아 온 것과도 같은 역할을 함양의 문화원이 하고 있다. 이것은 함양문화원에 뱀처럼 도사린 식민사관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말해주는 단적인 예가 될 수가 있을 것이다.
함양군사에 기록에 의하면 식민사관의 전파에 참여하신 집필위원님들은
집필위원장 김성진
집필위원 김윤수 김찬수 김흥식 박영일 소재우 양정렬 유성기 임채갑 정문상 정상기 정수상 홍동초 등 이상 13명이다.
이분들이 누구인지? 어떤 분들인지는 잘 모른다.
함양군사가 거창군사와 다른 점은 거창군사는 새로운 내용일 때는 반드시 근거를 밝혔고 최소한 근거가 없는 자료를 만들어서 기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위에 기록된 집필진 여러분들이 100여 년 전에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민족적 패배주의와 열등감을 이식하려는 식민사관의 내용을 함양의 군사에 그대로 옮겨서 적어놓고 근거도 없는 자료는 만들어서 조작하여 놓았다.
물론 집필위원님 중 어떤 사람은 철저하게 일본인들의 교육을 받고 일본인이 되어 일본을 위해서 열정을 가지고 함양군사의 작성에 임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분은 식민사관에 빠져서 식민사관인지 민족사관인지 구분이 안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은 식민사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일본인들의 식민사관의 내용들이 가감 없이 그대로 인쇄되어 전국으로 배포된 사실을 미루어 보면 함양문화원에 이름을 올리고 활동을 하는 이러한 분들은 일본인들이 뿌려놓은 식민사관의 맹종 또는 추종하는 분들임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다른 일반 행정기관도 아닌 함양의 정신문화를 새롭게 해야 할 함양문화원이 식민사관에 오염된 정도가 이렇게 심각할 줄은 군민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함양의 식민사관이 얼마나 뿌리가 깊은가 ?
그 깊이를 알고 싶으면 함양이 자랑하는 상림 숲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상림 숲은 함양사람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신라시대에 고운 최치원선생님이 함양태수로서 계실 때 매년 지속되는 홍수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축성을 한 것이 상림 숲이라고 알고 있다. 지방관으로서 백성을 위한 권력의 행사가 바로 이러한 것이라는 권력행사의 진수를 보여 준 것이다. 지방관으로서 작은 권력의 행사였겠지만 그의 행위는 천년을 넘어 오늘 날에도 백성들이 그분을 존경하고 생각토록 하는 훌륭한 업적이다.
그런데 그의 『문창후최선생 신도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중국에서 벼슬을 하다가 신라에 돌아온 뒤에 당시 국정의 문란함에 실망하여 대산, 천령, 부산 등의 태수를 지내다가 마지막에는 해인사 가야산에 은거하여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상의 시시비비를 달관했을 함양태수 최치원선생님을 한낱 시중 잡배와 같은 불평불만자로 기록하여 신라 최고 지식인의 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리고 함양이라는 지역은 중앙정부에 대하여 불평불만 품은 자들이 귀양이나 오는 곳으로 스스로 함양군을 폄하하고 있다.
작은 권력이라도 어떻게 행사를 하는 것이 진정한 백성들을 위한 것인가라는 권력행사의 진수를 보여준 수백만 공무원과 공직자들에게 귀감으로만 남았어도 얼마나 좋았을 텐데, 세월을 뛰어넘는 민족 최고의 지식인을 불평불만자로 격하하고 아름다운 함양을 불평불만 자들의 일시적인 귀양지로 비하를 시키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뿌리 깊은 함양에 박힌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함양문화원에서 발행한 함양군사에 일본의 식민사관에 근거한 식민사관의 확대 전파와 조상의 폄하와 고향을 비하하는 시발점은 상림의 『문창후신도비문』에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뿌리 깊은 식민사관의 영향은 식민사관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함양군의 정치, 경제, 사회, 군민의 생활전반에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민선지방자치가 시작된 이래 함양의 지방자치능력은 전국에서 가장 크게 의심을 받고 있는 것도 모두가 함양에 내린 뿌리 깊은 일본인들이 심어놓은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함양의 지방자치는 주어진 함양자원의 활용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이 되어야 하나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며 왕년에 자랑하든 좌안동우함양의 문화적 긍지가 사라진지는 아주 오랜 옛날일이 되어 버렸다.
상급정치기관인 도나 중앙정부 등의 각 부처나 요소요소의 인적자원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지역에서 역사적인 조건이나 자연자원의 활용을 극대화를 병행했을 때만이 지방자치의 궁극적인 목적인 군민행복의 향상과 국가역량의 확대에 기여한다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고나 보조금을 받아서 자기들끼리 잔치나 벌이며 먹고사는 것, 그 이상의 가치는 없는 것이며 그것은 중앙정부나 상급기관에 빌붙어서 먹고사는 기생적인 지방정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식민사관에서 발생하는 자기 조상의 격에 대한 폄하와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 대하여 비하를 하면 할수록 자기조상이나 자신의 고향에 대한 애착이 생길 수가 없고 애착이 없는데 주인정신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러한 식민사관의 영향에서 나오는 선거풍토는 함양의 자연자원 활용의 극대화나 군민의 행복이나 경제능력의 확대보다는 그 마을에서 즉 지방자치단체장의 선거에 도움이 되는가아닌가 만이 선거의 쟁점이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선거가 되어 왔다.
권력의 주체요 인격체인 군민을 오직 표로서만 보았기 때문에 표가 나오지 않았으면 선거후에는 전체적인 자연자원 활용의 극대화나 정치적인 포용은 사라지고 행정의 보복으로 이어진 것이 함양이다. 마치 일본 제국주의시대에 일본 놈들이 조선인을 다루듯이 군민을 하나의 선거도구로만 보고 고향을 단체장들의 개인적인 축재의 시장이나 출세의 수단으로만 보기 때문에 부정과 비리가 발생한다.
그래서 함양의 지방자치능력은 전국에서도 가장 큰 의심을 받고 있고 이미 수차례의 보궐선거로서 증명이 되었고 상급정치기관에서 파견된 다른 지역출신의 책임자들로부터 통치를 받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러한 자치능력이 가장 의심을 받게 되는 몇 가지 행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선거결과 표가 나오지 않았다고 하여 지방자치단체의 보복행정이 실시되는 대표적인 곳이 안의면 귀곡마을이다.
거창군마리면대동리와의 경계에 위치한 귀곡리는 마천면이 대홍수를 겪은 후 자연재해특별지구로 지원된 수천억원의 지원금으로 전 함양군의 하천을 파고 뜯고 고치고 하는 데도 귀곡리 하천에는 돌 하나 들어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자연그대로 방치되고 있으며 마을의 중앙에 흐르는 개울은 철관을 묻고 시멘트로 덧씌워서 하천의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하여 버렸고 수백년 내려오는 그대로 동네가운데를 통관하는 길이 없어서 작은 동네를 그냥 한 바퀴를 도는데도 30분 이상 소요가 되고 산악지대에는 계획적이고 정상적인 임도나 농로가 없어서 자연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산 중에는 썩어서 자빠진 나무 때문에 산사태가 나고 나무가 또다시 쓰러져서 방치되는 악순환이 계속이 되어도 주민은 땔감을 구할 수가 없을 지경으로 되었고 「귀곡교」 라는 교량은 귀곡리에서도 2km나 멀리 떨어진 남의 마을에 만들어져서 마치 죽어서 자빠진 황소를 보는 듯 그 다리를 보는 주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러한 전시적인 보복행정의 표본이 화석처럼 함양에 굳어 있고 앞으로 이것은 보복행정의 표본으로 행정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연구대상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 방치가 되는지? 보복행정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볼일이다. 보복행정을 당하고도 그것이 보복인지도 모르는 순진한 분들에게 이렇게 고통을 주어도 되는 것일까?
이러한 왜곡현상은 애향심과 주인정신의 결여를 유도한 식민사관에서 시작된다.
뿌리 깊은 함양의 식민사관은 바로 상림의 『문창후최치원선생의 신도비』에서 『함양군사』에서 를 확대 재생산하고 전파하는 함양문화원에 깊숙이 박힌 식민사관의 영향 때문이다.
둘째로 함양군의원 중 어느 분이 황석산성의 역사를 중앙정부에서 연구를 해주면 좋겠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하는 의원이 있는가 하면 『함양군사 일고유감』에 대한 답변으로 정유재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학계나 전문가의 검토가 이루어 지지 않았다.」라고 했는데 역사적인 사실, 특히 심심산골 지방의 역사에 대해서 중앙정부나 학계나 전문가가 연구를 해주거나 검토해 주지를 않는다. 어느 역사든지 지방의 역사가 없는데 중앙의 역사는 있을 수 없다. 지방의 역사가 뭉쳐서 전체적인 중앙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방의 역사는 지방자치단체에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해야 한다. 그 지방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데 중앙정부에서 관심을 가져 줄 리는 절대로 없다. 역사에 관한한 지금까지의 사례가 그렇다. 서대문형무소, 동대문문화역사관, 등등의 모든 역사연구가 중앙정부에서 한 것이 아니라 해당 군이나 각 구청에서 용역을 주어 연구한 결과물인 것이다.
보복행정과 함양에군에서 스스로 해야할 일을 중앙에서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주인정신의 결여와 지방자치능력의 부족에서 기인된다.
함양군에 오염된 뿌리 깊은 식민사관을 배제하기 위하여 함양군에서 해야 할 일은
첫째로 먼저 함양군의 이름으로 발간된 함양군사가 일본인들의 의도적인 식민사관을 확대 재생산하고 전파하는 도구가 되도록 방치를 해서는 안 될 것이며 그것도 미래 어느 시점에 가서 할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에 회수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둘째로는 함양군에 뿌리 깊게 형성된 식민사관의 영향 아래에서 기록된 식민사관의 흔적을 찾아서 삭제하고 수정하는 문화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지방자치의 근본 목적인 지역사회 자연자원의 활용의 극대화방안을 찾아 모든 군민의 행복추구와 지방정부로서 국가능력의 향상에 기여하는 방안을 찾아야 하고 군민을 선거의 도구로만 생각하고 고향을 사적인 이익을 실현하는 시장으로 생각하는 행위를 배척하고 기관장이나 군의원님들은 단체장이 보복행정을 하도록 방치를 하거나 이러한 행위를 옹호하는 풍토를 과감하게 배척하여 함양의 자치능력을 회복하거나 또는 배양하는 내부운동이 필요하다.
함양군에서 살고 있는 함양인의 입장에서는 지구의 중심은 함양이고 지구의 주인은 함양군민이라는 사실이 진리이고 그것을 믿는 것이 주인정신이고 민족사관이다.
셋째로는 7년 임진전쟁을 종료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도 일본인들의 조작과 만행으로 잃어버린 위대한 함양인과 거창인의 역동적이고도 자랑스러운 극난극복의 역사를 찾는 를 연구하는 특별 T/F 팀을 구성하고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지속적이고 전문적인 연구를 하여 보완하고 또 보완을 해야 할 것이다.
황석산성이 위치한 함양군이 자신의 역사에 관심을 갖지 않는데 거창군이나 중앙에서 스스로 연구를 하겠다고 나서 줄 사람 아무도 없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1억 원의 군비를 낭비를 하고도 아무런 결과도 없는 『黃石山城 戰鬪 考證硏究 2009』와 같은 그런 방향설정이 잘못된 실수는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다.
낭비의 원인은 잘못된 연구를 하도록 방치하고 조장한 사람에게 그 책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잘못된 선택이나 집행을 이유로 “지난번에 한번 지원을 했는데 또 무슨 지원이냐?” 고 하는 고루한 관료들의 발상인 라는 “갑”이 “을”에게 특혜를 주는 식의 시혜적인 위치가 아니라 이라는 주인정신을 갖는 발상의 대전환으로 잃어버린 역사! 황석산성에 접근을 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최치원 함양태수가 지방관으로서의 권력행사가 천년이 지난 후에도 백성들에게 존경과 칭송을 받게 하는 상림 숲처럼 모든 공직자는 순간적인 안일을 위하거나 비굴한 출세를 위하여 아부를 할 것이 아니라 이를 배척하고 내가 가진 작은 권한의 행사가 바로 천년 후에도 국민들의 칭송을 받을 수가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며 주어진 직책에 따른 권력행사의 진수를 보여 준다면 그것이 바로 『함양군사(咸陽郡史)』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뿌리 깊은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길이 될 것이며 전국적으로 의심을 받고 있는 함양의 지방자치능력이 개선되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머리통 속에 먹물이 가득한 문어는 아주 영리하지만 자신의 생활을 기록하는 수단이 없어서 영원히 문어(文魚)가 될 수가 있어나 식민사관에 오염된 사람은 문어머리와 같이 머리통 속에 먹물이 가득하여도 오히려 그 먹물이 국민과 자라나는 청소년을 패배주의에 빠지게 하고 열정을 사라지게 만들고 열등한 국민과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드는 식민사관을 지속적으로 전파를 하여, 결과적으로 민족과 자신을 망가뜨리는 사람이 된다.
문어는 머리는 좋지만 기록된 문서가 없어서 세상을 지배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자기 종족을 위하여서는 기꺼이 희생을 한다. 연체동물인 문어(文魚) 보다도 훨씬 못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식민사관에 빠진 그들은 책을 만들어서도 안 되고 번역을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이 하는 행위 자체가 모두 대한민국과 국민과 청소년들을 오염을 시키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아직도 단체장이나 문화담당자가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하고 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판단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행정가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끝
황석역사연구소장 박선호
[답변]뿌리 깊은 함양의 식민사관과 문어(文魚)
- 작성일
- 2013-05-22 17:56:03
- 작성자
- 문화관광과
선생님께서 함양군사에 대해 깊은 관심과 고견을 주신 점 먼저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함양군사를 보완, 증보 또는 편찬하는 기회가 된다면 선생님이 주신 고견을 참고하여 정확한 역사적 고증을 통해 올바른 사관을 정립하고 함양군민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함양군사를 보완, 증보 또는 편찬하는 기회가 된다면 선생님이 주신 고견을 참고하여 정확한 역사적 고증을 통해 올바른 사관을 정립하고 함양군민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담당
- 행정과 행정담당(비서실) (☎ 055-960-5001)
- 최종수정일
- 2024.07.23 09: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