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노우명 (盧友明) : 1471~1574
- 작성일
- 2016-07-15 13:48:17
- 작성자
- 관리자
- 조회수 :
- 593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자는 군량(君亮), 호는 신고당(信古堂)이며 세조때의 청백리 노숙동의 손자로서 본관은 풍천이고 교리를 지낸 노분의 둘째 아들이다.
일두 정여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08년(중종 3) 형 노우량, 아우 노우영과 진사시에 나란히 합격하여 인근에서 노씨삼주(盧氏三珠)라 불렀다.
1518년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안우, 노필, 김대유등과 함께 관찰사의 추천으로 현릉(문종대왕과 현덕왕후의 릉) 참봉이 되었고 그 후 현량과에 추천되어 피선되었으나 조광조와 학문적으로 깊이 사귀었으므로 이듬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 당하였다.
고향으로 내려와 조그마한 집을 짓고 '신고당'이라 부르면서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음운학에 조예가 깊어 사성과 육예에 통하였고,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해서에 능하였다고 한다.
1523년 5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으며 훗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01년 숙종때 함양의 도곡서원에 제향되었다.
일두 정여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08년(중종 3) 형 노우량, 아우 노우영과 진사시에 나란히 합격하여 인근에서 노씨삼주(盧氏三珠)라 불렀다.
1518년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안우, 노필, 김대유등과 함께 관찰사의 추천으로 현릉(문종대왕과 현덕왕후의 릉) 참봉이 되었고 그 후 현량과에 추천되어 피선되었으나 조광조와 학문적으로 깊이 사귀었으므로 이듬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 당하였다.
고향으로 내려와 조그마한 집을 짓고 '신고당'이라 부르면서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음운학에 조예가 깊어 사성과 육예에 통하였고,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해서에 능하였다고 한다.
1523년 5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으며 훗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01년 숙종때 함양의 도곡서원에 제향되었다.
- 담당
-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