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노응규 (盧應奎) : 1861~1907
- 작성일
- 2016-07-15 13:49:15
- 작성자
- 관리자
- 조회수 :
- 661
장군의 호는 신암(愼庵)이며 1861년 3월 15일 안의면 당본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힘써 일찍이 벼슬길에 오르게되고 규장각주사와 동궁시종관등을 역임하다가 을미사변 이후 낙향하여 거사를 준비하였다.
서재기, 정수현, 박준필, 임경희, 서경호등의 동지와 더불어 1896년 2월19일 의병을 일으켜 진주에 잠입, 관찰부를 습격 점령하니 관찰사 조동필과 경무관 김세진은 도망쳤다.
일행은 병영과 무기, 양곡등 일체를 인수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면서 군사를 모집하여 의병대의 기반을 다졌다.
이 시기에 정한용도 지방의병을 모아서 진주성밖에 주둔하고 서로 호응하니 진주 일대는 완전히 의병들의 거점이 되었다.
그들은 쉬지않고 친일관리를 붙잡아 처단하여 질서를 바로잡아 나갔다.
이때에 대구로 도망쳤던 경무관 김세진은 대구 주재 관군 100명을 인솔하여 진주로 반격해 오다가 노장군의 선봉장인 서재기, 오종근의 의병 500명과 진주 동북방 70리쯤의 의령 정암 나루터에서 교전하였으나 의병들의 포위 공격에 패주하였다.
그 뒤로도 여러차례 관군의 반격이 있었으나 번번히 실패하였고 의병의 세력은 날로 증가하여 진주, 사천, 고성등 세 고을의 의병이 1만을 넘었다. 그 후 김해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의병간의 여러차례 교전도 있었지만 전투때마다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되었던 것은 안의 장수사의 승려였으면서 노장군의 휘하에서 선봉장을 맡았던 서재기의 공이 컸다.
그러던 중 대구의 관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해 오면서 의병간의 이간공작을 치열하게 벌여 성외 주둔중인 정한용의 제의로 병력을 각지에 분산 주둔시킨 일이 실책이되어 진주성의 허술함이 드러나게 되고 노장군도 삼가로 물러나 재기를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채 관군에 잡혀 대구 감옥에서 순직하였다.
한편 아버지 노이선과 형 노응교도 간악한 왜병에게 참살을 당하였음이 전해지고 있으며 1977년 정부에서는 노장군의 공적을 기리어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힘써 일찍이 벼슬길에 오르게되고 규장각주사와 동궁시종관등을 역임하다가 을미사변 이후 낙향하여 거사를 준비하였다.
서재기, 정수현, 박준필, 임경희, 서경호등의 동지와 더불어 1896년 2월19일 의병을 일으켜 진주에 잠입, 관찰부를 습격 점령하니 관찰사 조동필과 경무관 김세진은 도망쳤다.
일행은 병영과 무기, 양곡등 일체를 인수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면서 군사를 모집하여 의병대의 기반을 다졌다.
이 시기에 정한용도 지방의병을 모아서 진주성밖에 주둔하고 서로 호응하니 진주 일대는 완전히 의병들의 거점이 되었다.
그들은 쉬지않고 친일관리를 붙잡아 처단하여 질서를 바로잡아 나갔다.
이때에 대구로 도망쳤던 경무관 김세진은 대구 주재 관군 100명을 인솔하여 진주로 반격해 오다가 노장군의 선봉장인 서재기, 오종근의 의병 500명과 진주 동북방 70리쯤의 의령 정암 나루터에서 교전하였으나 의병들의 포위 공격에 패주하였다.
그 뒤로도 여러차례 관군의 반격이 있었으나 번번히 실패하였고 의병의 세력은 날로 증가하여 진주, 사천, 고성등 세 고을의 의병이 1만을 넘었다. 그 후 김해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의병간의 여러차례 교전도 있었지만 전투때마다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되었던 것은 안의 장수사의 승려였으면서 노장군의 휘하에서 선봉장을 맡았던 서재기의 공이 컸다.
그러던 중 대구의 관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해 오면서 의병간의 이간공작을 치열하게 벌여 성외 주둔중인 정한용의 제의로 병력을 각지에 분산 주둔시킨 일이 실책이되어 진주성의 허술함이 드러나게 되고 노장군도 삼가로 물러나 재기를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채 관군에 잡혀 대구 감옥에서 순직하였다.
한편 아버지 노이선과 형 노응교도 간악한 왜병에게 참살을 당하였음이 전해지고 있으며 1977년 정부에서는 노장군의 공적을 기리어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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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59